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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즉, 현실적인 구원자가 나타나서 지금의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해내고 자신들의 민족을 숨통 트이게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들에게는 전혀 구미에 맞지 않는 시골뜨기 잡것에 불과했습니다. 전혀 정치적이지도 전혀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지요. 그냥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마약과도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어쩌면 지금 세상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무슨 용한 존재가 나타나서 자신의 갑갑한 현실을 구제해주기를 바라고 있지요. 슈퍼맨이라도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방향은 그릇되었고 그들의 욕구와 호기심은 전혀 엉뚱한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의 화제 거리를 찾아 다니면서 정작 진정한 생명을 찾는 법을 모르고 있지요.

한국을 살펴봅시다. 각종 문제가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시간이 멀다 하고 터지고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그런 문제들을 끌어안고 전면에 나서서 해결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또 영웅적인 인물을 목말라하지요. 그러다보니 전혀 엉뚱한 인물에게 속기도 많이 하고 헛걸음을 하기도 합니다. 참된 평화를 외쳐대길래 거기에 갔더니 온통 싸움질일 뿐이고 서로를 이간질 시켜서 다투게 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정말 큰 이슈가 되었으며 연일 뉴스에 떠들어 대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탐욕스런 사람들은 멈출 줄을 모르고 같은 오류를 반복해서 하고 있고 그 결과로 같은 사건들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지요. 삼풍 이전에라고 그런 일이 없었을 리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고 터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중인 셈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흔들리는 잡초처럼 이리 몰려 다니며 흥분하고 저리 몰려 다니며 흥분하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참된 생명의 말씀을 지닌 분의 발밑에 머물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새기는 작업은 멀리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서빙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면서 마리아를 시기하는 마르타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결국 정치적으로 인기있는 사람, 즉 방송이나 뉴스 기사를 통해서 유명해지는 사람의 유명세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늘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어디에 두더라도 같은 길을 걷게 되지요.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한 법입니다. 반대로 그때그때 기회를 노리고 더 나은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제 속을 채우고 있는데 그걸 보며 누구는 칭찬을 하고 누구는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찰나’를 살아가기에 그분의 영원성을 이해할 수 없고 그분의 섭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지요. 하지만 그분은 아직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천둥 속에도 화염 속에도 머무르지 않으시고 잔잔한 바람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어찌나 시끄러운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더라도 알아보기는 커녕 다시 더 혹독한 죽음을 선고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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