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찾아왔습니다.
“너희들 중에 나 아는 사람 있니?”
아무도 모른답니다.
“얘들아, 난 너희들이 왜 나를 찾아 온 지 알아. 그건 바로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야.”
아이들 표정이 가관입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원하는 걸 얻고 나면 사라져 버리겠지.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거 아니?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우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걸 말야.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고는 버려버리지. 심지어는 연인들 간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상대에게 있을 때에만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이 사라지면 상대를 버려버린단다.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셈이지. 그러니 너희들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라. 참된 우정을 맺도록 노력해. 알겠니? 자, 그럼 이제 나를 이용하거라.”
잠시 할 말을 잊은 아이들이 뜨문뜨문 말을 시작합니다.
“저, 교회 일치...”
“잠깐만, 뭔가를 묻기 전에 그걸 먼저 확실히 알고 묻도록 해. 자신도 모르는 걸 대상으로 질문하지 않기를 바래. 적어도 너희들이 어느 정도 아는 선에서 질문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 질문해봐.”
“교회 일치(ecumenismo)가 무엇인가요?”
“네가 하는 교회 일치는 무엇인데?”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요?”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 한 가족이고 형제야. 그래서 우리는 같이 하느님을 향해서 걸어 나가야 해. 그것이 바로 교회 일치라고 하는 것이란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서 걸어 나가야 하지. 하지만 이 말이 서로 완전히 같아지라는 의미가 아니야.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어. 그래서 서로 존중해야지. 하지만 방향은 놓치면 안되. 예를 들어볼까? 한 가족 안에 형제들이 저마다 다른 음식 취향을 지닐 수 있겠지? 큰 형이 돈까스를 좋아한다고 햄버거를 좋아하는 다른 동생들에게 무조건 돈까스를 먹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어. 그건 업악이야. 하지만 큰 형이든 다른 동생들이든 모두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해야 하는거지. 바로 그것이 교회 일치라고 하는 거란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해. 서로가 가진 유산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종교는 다른 종교를 공격하고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특히나 가톨릭은 그 주된 공격대상이 되곤 하지. 많은 형제 종교들은 가톨릭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지. 예를 하나 들자면, 성경에서는 그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왜 사제를 아버지(Padre)라고 부르느냐? 뭐 이런 식이지. 하지만 모든 성경 말씀은 그 본질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 단순히 문자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거야. 다른 존재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지 말라는 뜻이지.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말야. 헌데 사람들은 이미 ‘돈’을 아버지의 자리에 놓고 있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거지. 우상숭배이고 말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가톨릭을 공격하려고 하는거야. 그런 식으로 성모님을 공격하고, 그런 식으로 고해성사와 미사를 공격하곤 해.
헌데 그거 아니? 이곳 사람들이 왜 가톨릭을 공격하려는지 말야? 왜냐하면 가톨릭에서는 가르치는 것이 엄격해서 자신들이 싫거든. 특히나 이곳 남미에서는 혼인 문제가 많은데 한 남성이 여러 여자들을 거치면서 배다른 자녀들을 가지고 있지. 그런 상태에서 가톨릭의 혼인 교리가 그들에게 거슬리는 거야. 그래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다른 종교를 선택하고 그 종교에 머무르면서 가톨릭을 비판하는 일이 허다하지. 즉 자신의 삶이 비뚤어져서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거야. 가톨릭이 가르치는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충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충실해서 성가정을 이루게 하자는 거야. 헌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거부감을 느끼는 거라구. 하지만 가톨릭은 그런 이들도 내치지 않아. 품어 안으려고 하지.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니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당사자들이야. 이는 마치 어느 딸아이가 밤에 몰래 나가서 남자친구와 키스하고 싶은데 그걸 허락해주지 않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 이곳에는 이런 이유 때문에 가톨릭에 막연히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게 아니란다. 설령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세례도 견진도 혼배도 모두 받았다고 쳐. 헌데 집에 가서는 아내를 때리고 술을 맨날 퍼마시고 아이들을 위협하면 그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야. 그는 삶을 바꿔야해. 이는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야. 가톨릭은 타 종교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살아가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 그들도 자신의 종교의 교리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면 충분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는거야. 선하고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못난 가톨릭 신자보다 나은 법이지.
하지만 나는 가톨릭을 사랑해. 가톨릭의 영적 유산 그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 교회의 성사들은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보물들이야. 그래서 나는 내가 지닌 가톨릭 신앙을 소중히 여기지.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가톨릭 세례를 그냥 받는거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받는 게 아니라, 이든 저든 받아두는 것에 불과하지. 그래서 가톨릭 신앙을 진정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없어.
교회 일치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결국 하느님에게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야. 그 의미에서 나는 교회 일치에 동의해. 하지만 모든 교회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합쳐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그 밖에도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지금 기억나는 것은 이정도입니다.
“너희들 중에 나 아는 사람 있니?”
아무도 모른답니다.
“얘들아, 난 너희들이 왜 나를 찾아 온 지 알아. 그건 바로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야.”
아이들 표정이 가관입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원하는 걸 얻고 나면 사라져 버리겠지.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거 아니?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우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걸 말야.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이용하고는 버려버리지. 심지어는 연인들 간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상대에게 있을 때에만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이 사라지면 상대를 버려버린단다.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셈이지. 그러니 너희들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라. 참된 우정을 맺도록 노력해. 알겠니? 자, 그럼 이제 나를 이용하거라.”
잠시 할 말을 잊은 아이들이 뜨문뜨문 말을 시작합니다.
“저, 교회 일치...”
“잠깐만, 뭔가를 묻기 전에 그걸 먼저 확실히 알고 묻도록 해. 자신도 모르는 걸 대상으로 질문하지 않기를 바래. 적어도 너희들이 어느 정도 아는 선에서 질문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 질문해봐.”
“교회 일치(ecumenismo)가 무엇인가요?”
“네가 하는 교회 일치는 무엇인데?”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요?”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 한 가족이고 형제야. 그래서 우리는 같이 하느님을 향해서 걸어 나가야 해. 그것이 바로 교회 일치라고 하는 것이란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서 걸어 나가야 하지. 하지만 이 말이 서로 완전히 같아지라는 의미가 아니야.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어. 그래서 서로 존중해야지. 하지만 방향은 놓치면 안되. 예를 들어볼까? 한 가족 안에 형제들이 저마다 다른 음식 취향을 지닐 수 있겠지? 큰 형이 돈까스를 좋아한다고 햄버거를 좋아하는 다른 동생들에게 무조건 돈까스를 먹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어. 그건 업악이야. 하지만 큰 형이든 다른 동생들이든 모두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해야 하는거지. 바로 그것이 교회 일치라고 하는 거란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해. 서로가 가진 유산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종교는 다른 종교를 공격하고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특히나 가톨릭은 그 주된 공격대상이 되곤 하지. 많은 형제 종교들은 가톨릭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지. 예를 하나 들자면, 성경에서는 그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왜 사제를 아버지(Padre)라고 부르느냐? 뭐 이런 식이지. 하지만 모든 성경 말씀은 그 본질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 단순히 문자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거야. 다른 존재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지 말라는 뜻이지.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말야. 헌데 사람들은 이미 ‘돈’을 아버지의 자리에 놓고 있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거지. 우상숭배이고 말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가톨릭을 공격하려고 하는거야. 그런 식으로 성모님을 공격하고, 그런 식으로 고해성사와 미사를 공격하곤 해.
헌데 그거 아니? 이곳 사람들이 왜 가톨릭을 공격하려는지 말야? 왜냐하면 가톨릭에서는 가르치는 것이 엄격해서 자신들이 싫거든. 특히나 이곳 남미에서는 혼인 문제가 많은데 한 남성이 여러 여자들을 거치면서 배다른 자녀들을 가지고 있지. 그런 상태에서 가톨릭의 혼인 교리가 그들에게 거슬리는 거야. 그래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다른 종교를 선택하고 그 종교에 머무르면서 가톨릭을 비판하는 일이 허다하지. 즉 자신의 삶이 비뚤어져서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거야. 가톨릭이 가르치는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충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충실해서 성가정을 이루게 하자는 거야. 헌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거부감을 느끼는 거라구. 하지만 가톨릭은 그런 이들도 내치지 않아. 품어 안으려고 하지.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니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당사자들이야. 이는 마치 어느 딸아이가 밤에 몰래 나가서 남자친구와 키스하고 싶은데 그걸 허락해주지 않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 이곳에는 이런 이유 때문에 가톨릭에 막연히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게 아니란다. 설령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세례도 견진도 혼배도 모두 받았다고 쳐. 헌데 집에 가서는 아내를 때리고 술을 맨날 퍼마시고 아이들을 위협하면 그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야. 그는 삶을 바꿔야해. 이는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야. 가톨릭은 타 종교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살아가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 그들도 자신의 종교의 교리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면 충분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는거야. 선하고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못난 가톨릭 신자보다 나은 법이지.
하지만 나는 가톨릭을 사랑해. 가톨릭의 영적 유산 그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 교회의 성사들은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보물들이야. 그래서 나는 내가 지닌 가톨릭 신앙을 소중히 여기지.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가톨릭 세례를 그냥 받는거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받는 게 아니라, 이든 저든 받아두는 것에 불과하지. 그래서 가톨릭 신앙을 진정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없어.
교회 일치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결국 하느님에게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야. 그 의미에서 나는 교회 일치에 동의해. 하지만 모든 교회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합쳐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그 밖에도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지금 기억나는 것은 이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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