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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과 고통에 대한 몰이해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5)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에게 ‘본다’는 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에게는 색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감촉이 존재할 뿐입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감지할 수 없는 대상은 그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 셈이지요. 그래서 ‘구름’이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눈을 들어 올려 하늘을 쳐다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많은 설명이 있고 나서야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영원에 대한 감각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상에서는 ‘돈’이 단연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눈에 보이고 쌓아둘 수 있고 그 영향력은 직접적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외적 치유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많은 경우 숨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심지어는 당신의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비유를 풀어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그분께서 가르치신 ‘수난과 고통’의 가르침에 이르러서 제자들의 몰이해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 가르침에 있어서 제자들은 다시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었고 고통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한동안 누가 예수님의 첫째 제자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다투곤 했던 것입니다.

우리라고 그것을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모습에 가깝지요. 우리는 종교라는 것을 고통당하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위해서 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가지 취미 생활 가운데 하나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종교가 현실을 침해하기 시작할 때에 대부분의 경우 종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신앙의 가르침을 현실에 곧이 곧대로 적용했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고 있지요. 결국 그들은 신앙을 ‘옵션’으로 지니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정직하게 살아가? 다들 조금씩 속이면서 사는거지.’
‘아니 내가 신부나 수녀가 될 것도 아니고 뭐,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거지.’

이런 표현들은 마치 우리의 신앙이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신앙의 본질적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지요. 신앙이 우리의 근본 선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님?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뭘 어쩌실려구요? 오히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 받으셔야지요?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트 빵빵 쏘아 드릴께요. 저희가 사랑하는 거 아시잖아요? 안그래요? 당신은 위대한 주님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잖아요. 우리가 어찌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흥분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과연 자신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낼 준비가 되어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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