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성인 견진반 교사들이 찾아와서 오늘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주제는 ‘미사전례’에 대한 것이었지요. 과연 미사란 무엇이며 전례적으로 어떻게 준비하고 참여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미사란 무엇일까요? 성체성사라고도 표현되는 것이지요. 미사는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파스카 만찬을 나누시면서 거기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선언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를 기억하여 행하라고 하신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답은 간단합니다. ‘나를 기억하라’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이미지와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미지와 목소리의 기억은 이미 당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애써 그분의 수의를 찾아내어 모습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사실 별 의미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이미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이 의도하신 바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의도하신 바는 뚜렷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당신의 삶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이들의 삶을 먼저 살아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었지요. 우리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마음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이 ‘형식화’로 끝나지 않도록, 즉 죽어버린 행위로 끝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은 신앙’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죽은 행위를 채우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끝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채로 외적으로 교무금을 내고,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형식적인 판공을 보면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 하고 있노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내면이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절대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지요.
여전히 우리의 삶이 방탕하고 거짓과 부정과 위선과 죄에 빠져 있다면 먼저 그 삶을 정돈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어둠의 쇠사슬을 끊어야 자유로워진 몸으로 운동을 해서 힘을 기를 수 있겠지요. 그래서 미사 전에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미사를 드리기 전에 위중한 죄가 있다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큰 죄가 없다면 미사 안의 참회 예절에 마음 깊이 참례해서 작은 잘못이라도 씻어내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씻고 나면 말씀의 전례가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양식을 얻는 것이지요. 구약의 말씀(1독서)과 시편, 그리고 신약 서간의 말씀(2독서)으로 사전 준비를 갖춘 뒤에 비로소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좀 더 현실의 삶에 맞게 풀이해주는 사제의 강론이 이어집니다. 말씀의 전례는 미사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영혼의 밭고랑을 갈아 놓아야 이어지는 성찬의 전례에서 하느님의 몸을 더욱 합당하게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사제들은 이 영혼의 양식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현실을 알고 그에 합당한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인기를 위해서 강론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마른 빵을 주어서도 안되고,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배를 채우지 못하는 맹물만 줘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위로를 주고, 경고가 필요한 이에게 경고를 하고, 충고가 필요한 이에게는 충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이라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제의 큰 책임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말씀의 전례 후에 사제는 성찬의 전례를 준비하고 그 사이 신자들은 봉헌을 합니다. 교무금은 교회의 살림을 미리 약속하고 돕는 것이고 봉헌은 한 주간의 신자들의 정성을 드리는 순간입니다. 교무금은 마치 십일조의 개념으로 생각되는 것이고 봉헌금은 그때그때 미사에 우리의 감사의 행위를 내어바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주일만 봉헌을 하고 평일 미사에는 봉헌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남미에서는 평일에도 봉헌을 하기도 합니다. 대신 남미에서는 교무금의 개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지요. 봉헌은 언제나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의 정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매주 술집에 가서는 십만원이고 이십만원이고 우습게 쓰는 사람, 백화점을 밥먹듯이 들리면서 자기 옷은 수십, 수백만원을 주고 사는 사람이 봉헌때만 되면 어쩜 다들 그렇게 구두쇠가 되는 걸까요? 봉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봉헌은 정성을 내어바치는 것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으니 만원 한 장을 내는 것이 아까울 수 밖에요.
이어 성찬의 전례가 이어집니다. 사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의 역할로 기도문들을 읽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노래를 해야 할 때에는 큰 소리로 부르고, 응답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자들은 미사에 참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관람’을 하러 오니까요. 신자들은 자신들이 미사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사 안에서 전례문을 읽고 예식을 주도하는 사제의 역할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마음을 모으고 마련된 잔칫상에서 더 맛있고 영양가 있는 영적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아주 작은 참여라도 소홀히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노래부르고 더 열심히 응답해야 합니다.
상이 마련되고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지요. 특별한 어려움이 없는 이상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적지 않은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고해로 해소하지도 않았는데 주변의 시선 때문에 나아가서 성체를 모시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한국과 같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는 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요. 남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아예 성체를 모실 생각을 않는 것이지요. 물론 대부분의 문제는 혼인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된 이들, 관계가 파괴된 이들이 혼인에 대해서 중요시 생각하지 않고 신자이면서도 사회혼만을 하고 지내는 가정이 많아서 성체를 모실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지요. 이런 가정들은 하루빨리 자신의 삶을 추스리고 하느님 앞에 성가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사제도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지요.
예수님께서 성체라는 음식으로 신자들과 하나되고나면 예식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침묵 중에 예수님과의 합일을 느끼고 사제는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난 후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이 ‘침묵’ 역시 전례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때로 쉼표가 있는 부분에서 확실히 그만큼을 쉬면서 일종의 ‘연주’를 하는 것처럼 전례 안에서의 ‘침묵’도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를 성찰할 때에 침묵을 잘 지켜야 하며, 또 사제의 복음 낭독과 강론이 끝난 후에도 그것을 소화시키는 침묵 시간이 꼭 필요하고, 나아가 성체를 모시고 난 후에도 침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제는 마지막 강복을 주고 신자들을 ‘파견’합니다. 즉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는 해산이 아니라 세상으로 임무를 맡겨 보내는 예식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미사’라는 말의 의미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라틴어의 “ite misa est”(가십시오, 나는 그대를 보냅니다.)라는 말에서 미사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미사는 곧 ‘미션(mission)’, ‘파견’인 셈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체를 모셨으니 집으로 들어가서 혼자만의 구원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겪은 구원의 생생한 체험, 우리에게 빵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 그것을 체험한 우리의 기쁨을 아직 그것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당신의 몸을 빵과 포도주로 바꾸어 우리에게 매주, 가능하다면 매일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는 또한 당연히 ‘감사’와 연결되게 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받은 것이 많은데 어찌 감사하지 않겠으며 그 감사가 어찌 우리의 봉헌 행위와 연결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사는 감사인 것입니다.
미사는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 제사이기도 합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양의 희생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더는 실제적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제사로 바뀐 것이지요.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그 속죄의 은총을 늘 되새기고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미사는 실로 거룩하고 위대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사란 무엇일까요? 성체성사라고도 표현되는 것이지요. 미사는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파스카 만찬을 나누시면서 거기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선언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를 기억하여 행하라고 하신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답은 간단합니다. ‘나를 기억하라’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이미지와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미지와 목소리의 기억은 이미 당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애써 그분의 수의를 찾아내어 모습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사실 별 의미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이미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이 의도하신 바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의도하신 바는 뚜렷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당신의 삶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이들의 삶을 먼저 살아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었지요. 우리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마음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이 ‘형식화’로 끝나지 않도록, 즉 죽어버린 행위로 끝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은 신앙’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죽은 행위를 채우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끝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채로 외적으로 교무금을 내고,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형식적인 판공을 보면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 하고 있노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내면이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절대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지요.
여전히 우리의 삶이 방탕하고 거짓과 부정과 위선과 죄에 빠져 있다면 먼저 그 삶을 정돈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어둠의 쇠사슬을 끊어야 자유로워진 몸으로 운동을 해서 힘을 기를 수 있겠지요. 그래서 미사 전에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미사를 드리기 전에 위중한 죄가 있다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큰 죄가 없다면 미사 안의 참회 예절에 마음 깊이 참례해서 작은 잘못이라도 씻어내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씻고 나면 말씀의 전례가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양식을 얻는 것이지요. 구약의 말씀(1독서)과 시편, 그리고 신약 서간의 말씀(2독서)으로 사전 준비를 갖춘 뒤에 비로소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좀 더 현실의 삶에 맞게 풀이해주는 사제의 강론이 이어집니다. 말씀의 전례는 미사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영혼의 밭고랑을 갈아 놓아야 이어지는 성찬의 전례에서 하느님의 몸을 더욱 합당하게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사제들은 이 영혼의 양식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현실을 알고 그에 합당한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인기를 위해서 강론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마른 빵을 주어서도 안되고,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배를 채우지 못하는 맹물만 줘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위로를 주고, 경고가 필요한 이에게 경고를 하고, 충고가 필요한 이에게는 충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이라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제의 큰 책임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말씀의 전례 후에 사제는 성찬의 전례를 준비하고 그 사이 신자들은 봉헌을 합니다. 교무금은 교회의 살림을 미리 약속하고 돕는 것이고 봉헌은 한 주간의 신자들의 정성을 드리는 순간입니다. 교무금은 마치 십일조의 개념으로 생각되는 것이고 봉헌금은 그때그때 미사에 우리의 감사의 행위를 내어바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주일만 봉헌을 하고 평일 미사에는 봉헌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남미에서는 평일에도 봉헌을 하기도 합니다. 대신 남미에서는 교무금의 개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지요. 봉헌은 언제나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의 정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매주 술집에 가서는 십만원이고 이십만원이고 우습게 쓰는 사람, 백화점을 밥먹듯이 들리면서 자기 옷은 수십, 수백만원을 주고 사는 사람이 봉헌때만 되면 어쩜 다들 그렇게 구두쇠가 되는 걸까요? 봉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봉헌은 정성을 내어바치는 것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으니 만원 한 장을 내는 것이 아까울 수 밖에요.
이어 성찬의 전례가 이어집니다. 사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의 역할로 기도문들을 읽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노래를 해야 할 때에는 큰 소리로 부르고, 응답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자들은 미사에 참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관람’을 하러 오니까요. 신자들은 자신들이 미사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사 안에서 전례문을 읽고 예식을 주도하는 사제의 역할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마음을 모으고 마련된 잔칫상에서 더 맛있고 영양가 있는 영적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아주 작은 참여라도 소홀히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노래부르고 더 열심히 응답해야 합니다.
상이 마련되고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지요. 특별한 어려움이 없는 이상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적지 않은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고해로 해소하지도 않았는데 주변의 시선 때문에 나아가서 성체를 모시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한국과 같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는 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요. 남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아예 성체를 모실 생각을 않는 것이지요. 물론 대부분의 문제는 혼인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된 이들, 관계가 파괴된 이들이 혼인에 대해서 중요시 생각하지 않고 신자이면서도 사회혼만을 하고 지내는 가정이 많아서 성체를 모실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지요. 이런 가정들은 하루빨리 자신의 삶을 추스리고 하느님 앞에 성가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사제도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지요.
예수님께서 성체라는 음식으로 신자들과 하나되고나면 예식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침묵 중에 예수님과의 합일을 느끼고 사제는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난 후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이 ‘침묵’ 역시 전례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때로 쉼표가 있는 부분에서 확실히 그만큼을 쉬면서 일종의 ‘연주’를 하는 것처럼 전례 안에서의 ‘침묵’도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를 성찰할 때에 침묵을 잘 지켜야 하며, 또 사제의 복음 낭독과 강론이 끝난 후에도 그것을 소화시키는 침묵 시간이 꼭 필요하고, 나아가 성체를 모시고 난 후에도 침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제는 마지막 강복을 주고 신자들을 ‘파견’합니다. 즉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는 해산이 아니라 세상으로 임무를 맡겨 보내는 예식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미사’라는 말의 의미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라틴어의 “ite misa est”(가십시오, 나는 그대를 보냅니다.)라는 말에서 미사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미사는 곧 ‘미션(mission)’, ‘파견’인 셈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체를 모셨으니 집으로 들어가서 혼자만의 구원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겪은 구원의 생생한 체험, 우리에게 빵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 그것을 체험한 우리의 기쁨을 아직 그것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당신의 몸을 빵과 포도주로 바꾸어 우리에게 매주, 가능하다면 매일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는 또한 당연히 ‘감사’와 연결되게 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받은 것이 많은데 어찌 감사하지 않겠으며 그 감사가 어찌 우리의 봉헌 행위와 연결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사는 감사인 것입니다.
미사는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 제사이기도 합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양의 희생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더는 실제적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제사로 바뀐 것이지요.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그 속죄의 은총을 늘 되새기고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미사는 실로 거룩하고 위대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