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단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다른 무언가에게 탓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 행한 것을 인정하는 데에 따라오는 수치심과 그 중압감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무조건 강아지 잘못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탓을 돌리지 못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탓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약자들은 곧잘 억울하게도 강자들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에 자신의 죄는 최대한 숨기고 다른 누군가의 죄를 최대한 드러내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수치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한 결과도 받아들이기 힘들면서 과연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잘못의 결과를 짊어질 수 있을까요? 헌데 우리는 마치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곤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잘못도 지고 가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듯한 인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자주 만나게 되지요.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사실 다른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 스스로 싸질러놓은 오류들을 우리 스스로 메꾸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는 오류를 만들어내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꾸려 나가는 이들은 나아가 다른 이들의 십자가도 나눠 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두고 ‘그럼 성인이라도 되라는 거냐?’라고 항의하듯 따지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이는 ‘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쉽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려운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구원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험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실천해서 성령의 움직임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는 불가능했던 구원이라는 것이 어느새 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에 자신의 죄는 최대한 숨기고 다른 누군가의 죄를 최대한 드러내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수치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한 결과도 받아들이기 힘들면서 과연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잘못의 결과를 짊어질 수 있을까요? 헌데 우리는 마치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곤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잘못도 지고 가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듯한 인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자주 만나게 되지요.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사실 다른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 스스로 싸질러놓은 오류들을 우리 스스로 메꾸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는 오류를 만들어내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꾸려 나가는 이들은 나아가 다른 이들의 십자가도 나눠 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두고 ‘그럼 성인이라도 되라는 거냐?’라고 항의하듯 따지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이는 ‘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쉽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려운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구원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험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실천해서 성령의 움직임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는 불가능했던 구원이라는 것이 어느새 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