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첫째로 물어야 할 질문은, ‘기쁜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기뻐하는지에 따라서 같은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될 수도, 반대로 슬픈 소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식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반대로 세상에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됩니다. 그래서 역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메세지를 실제로 접할 때에 기쁨을 느끼는지 슬픔을 느끼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들으면서 기뻐하기보다는 슬퍼한다면 그 이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원수’가 존재하고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반대로 열심히 증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보물을 얻어라.”라는 말에 기뻐하기보다 슬퍼한다면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천상의 보물이 아니라 세상의 보물이고 여전히 그것을 아까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에 기뻐하기보다 슬퍼한다면 여전히 우리가 세상에서 첫째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고 남보다 나아지려고 교만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세지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즉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명을 이어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소식이 나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걸 도대체 무슨 수로 다른 이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한다는 말입니까? 입으로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첫째로 물어야 할 질문은, ‘기쁜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기뻐하는지에 따라서 같은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될 수도, 반대로 슬픈 소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식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반대로 세상에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됩니다. 그래서 역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메세지를 실제로 접할 때에 기쁨을 느끼는지 슬픔을 느끼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들으면서 기뻐하기보다는 슬퍼한다면 그 이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원수’가 존재하고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반대로 열심히 증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보물을 얻어라.”라는 말에 기뻐하기보다 슬퍼한다면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천상의 보물이 아니라 세상의 보물이고 여전히 그것을 아까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에 기뻐하기보다 슬퍼한다면 여전히 우리가 세상에서 첫째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고 남보다 나아지려고 교만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세지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즉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명을 이어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소식이 나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걸 도대체 무슨 수로 다른 이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한다는 말입니까? 입으로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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