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살 것인가?
내가 살고자 하면 주님 당신이 죽고, 주님이 살게 되면 내가 죽게 됩니다. 나의 생은 유한하니 결국 다시 죽게 되고 그때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살면 그분은 영원히 살게 되니 나는 죽음을 모르는 자가 됩니다. 단순한 이론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이는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이미 쌓여있는 구두를 두고 신상 구두 하나 새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니 결국 위선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책
구원은 책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순간 선물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글씨를 읽을 줄 모르면 책을 선물로 받아도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찾고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선물하시지만 그들은 거기에 적힌 생명의 말씀을 읽을 줄 몰라 다시 그 책을 내동댕이 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사랑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라는 주석을 달 줄 알아야 하지요. 그래야 그 구원의 책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루'는 하느님의 구원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도 사랑도 모른 채로 그 겉표지 색깔만 보고 그 안에 든 글씨를 읽지도 않고 하루를 낭비하게 됩니다. 슬픈 일이지요.
욕구에 따라
실제로 사람을 움직이는 건 그 안에 내재된 욕구입니다. 외부적인 자극과 동기가 마련되더라도 욕구가 없다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구가 있다면 사람은 그 대상을 찾아 나서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욕구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욕구를 억지로 없다고 속여서도 안되고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을 타인에게 탓을 돌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우리 안에 내재된 욕구의 방향이 그릇된 것까지도 수용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가 2층에서 화분을 밀어 떨어뜨려 그걸 맞고 한 사람이 죽었다고 그것이 갓난아이의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죄가 되는 행위는 그가 그것에 의지적으로 동의할 때에 일어납니다. 어른이 되어서 자신이 한 행동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대부분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우리의 욕구를 인정하고 잘못을 저지른 우리를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의사는 병든 이들에게
간단히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정도의 약점이 있어서 언제나 위로하려는 분, 치유하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헌데 우리 가운데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사를 거부하는 병자들이지요.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영적 교만으로 실제적인 문제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최악인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는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선한척 내세우는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으로 모든 것을 망치면서도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인 척 흉내를 냅니다. 가장 지독한 부류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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