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20)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에 따라서 그 대상의 가치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일까요?
신앙이라는 것,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제와서 예수님을 외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면 단순히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존재했던 한 뛰어난 사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내적으로 보는 시각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분을 내적인 가치로 바라보게 되면 비로소 보아야 할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 내적 가치라는 것을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리더쉽의 귀감’으로 삼고, 누군가는 ‘경제학의 지표’로 삼고, 누군가는 ‘기적의 치유자’로 삼곤 합니다. 그 외에도 저마다 생각하는 내적 지표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실제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안의 ‘성령’만이 그분의 참된 실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을 지닌 이들만이 예수님을 원래의 자리에 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고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참된 가치를 알고 사람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성령에 가득한 사람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참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과 나약함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곧잘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실체를 다시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루카 9,20-21)
누군가 고백을 한다고 해서 그 고백이 다른 이들에게 쉽게 이해되어질 리가 없습니다. 오직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모습입니다. 때로는 정말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사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조금씩 감을 잡아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기심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하려고 할 때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위한 삶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일종의 ‘표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그분을 ‘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에 따라서 그 대상의 가치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일까요?
신앙이라는 것,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제와서 예수님을 외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면 단순히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존재했던 한 뛰어난 사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내적으로 보는 시각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분을 내적인 가치로 바라보게 되면 비로소 보아야 할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 내적 가치라는 것을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리더쉽의 귀감’으로 삼고, 누군가는 ‘경제학의 지표’로 삼고, 누군가는 ‘기적의 치유자’로 삼곤 합니다. 그 외에도 저마다 생각하는 내적 지표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실제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안의 ‘성령’만이 그분의 참된 실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을 지닌 이들만이 예수님을 원래의 자리에 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고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참된 가치를 알고 사람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성령에 가득한 사람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참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과 나약함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곧잘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실체를 다시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루카 9,20-21)
누군가 고백을 한다고 해서 그 고백이 다른 이들에게 쉽게 이해되어질 리가 없습니다. 오직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모습입니다. 때로는 정말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사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조금씩 감을 잡아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기심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하려고 할 때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위한 삶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일종의 ‘표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그분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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