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하나를 이해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통증’이 있어야 체감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파야 비로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 통증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통증이 있어야 비로소 사물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통증은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통증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통증으로 하던 일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발가락이 아픈데 다시 공을 차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영적인 통증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전히 ‘둔감’합니다. 분명 통증을 느끼는데 그 통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사라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다고 스스로 믿는 셈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 미움 때문에 마음 괴로워 하면서도 그 미움을 그치지 않으니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어리석은 이들일 뿐입니다. 증오가 자신 안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놓았는데도 그 증오를 그치지 않으니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몸의 통증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정신적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통증에 둔감해지게 됩니다. 몸을 살리겠다고 영혼을 죽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통증은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통증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통증으로 하던 일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발가락이 아픈데 다시 공을 차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영적인 통증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전히 ‘둔감’합니다. 분명 통증을 느끼는데 그 통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사라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다고 스스로 믿는 셈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 미움 때문에 마음 괴로워 하면서도 그 미움을 그치지 않으니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어리석은 이들일 뿐입니다. 증오가 자신 안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놓았는데도 그 증오를 그치지 않으니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몸의 통증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정신적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통증에 둔감해지게 됩니다. 몸을 살리겠다고 영혼을 죽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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