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후의 보속이라는 것을 마치 우리가 산 물건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보속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 상의 피흘림의 제사로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보속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죄를 ‘무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당신 외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거저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공짜’입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죄이든 ‘진심으로’ 뉘우치는 죄인에게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보속이라는 것은 왜 필요한 것일까요? 보속이라는 것은 죄를 떨치고 일어난 우리들이 선을 향해서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양제와 같은 역할입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죄의 경중에 따라서 보속을 달리해 주어 고해를 하는 이가 자신이 저지를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자신이 받은 보속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것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아무런 사후 조치 없이 죄만 사라진다면 인간은 그 나약함으로 인해서 다시 죄에 쉽게 빠져들고 말 테니까요.
죄의 용서, 즉 치료는 무상입니다. 보속은 죄인의 회복을 돕기 위한 교회가 처방하는 강장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속은 사제가 죄인의 고해를 잘 듣고 그의 회개가 진정이라면 얼마든지 경감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꾸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또 위중한 죄를 짓는다면 가중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모든 신앙인들은 ‘순명’하는 마음으로 사제가 주는 보속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너무나 무거운 보속이고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보속이라면 사제에게 정중히 건의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심결에 보속을 받아들고 왔는데 그런 위중한 보속이라서 도저히 지킬 수 없다면 다음 고해성사 때에 솔직히 말하고 사제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고해사제를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꼭 자기 본당의 사제에게 고해를 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해는 원하는 사제에게 가서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이 사제 저 사제를 빙빙 돌아가면서 자신의 수치를 경감시키려는 노력이라면 당장 그쳐야 합니다. ‘수치심’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죄를 반복하지 않게 도와주는 소중한 우리 내면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전화나 인터넷 상으로는 고해성사가 불가능합니다. 고해성사는 오직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죄를 ‘무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당신 외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거저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공짜’입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죄이든 ‘진심으로’ 뉘우치는 죄인에게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보속이라는 것은 왜 필요한 것일까요? 보속이라는 것은 죄를 떨치고 일어난 우리들이 선을 향해서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양제와 같은 역할입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죄의 경중에 따라서 보속을 달리해 주어 고해를 하는 이가 자신이 저지를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자신이 받은 보속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것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아무런 사후 조치 없이 죄만 사라진다면 인간은 그 나약함으로 인해서 다시 죄에 쉽게 빠져들고 말 테니까요.
죄의 용서, 즉 치료는 무상입니다. 보속은 죄인의 회복을 돕기 위한 교회가 처방하는 강장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속은 사제가 죄인의 고해를 잘 듣고 그의 회개가 진정이라면 얼마든지 경감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꾸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또 위중한 죄를 짓는다면 가중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모든 신앙인들은 ‘순명’하는 마음으로 사제가 주는 보속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너무나 무거운 보속이고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보속이라면 사제에게 정중히 건의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심결에 보속을 받아들고 왔는데 그런 위중한 보속이라서 도저히 지킬 수 없다면 다음 고해성사 때에 솔직히 말하고 사제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고해사제를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꼭 자기 본당의 사제에게 고해를 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해는 원하는 사제에게 가서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이 사제 저 사제를 빙빙 돌아가면서 자신의 수치를 경감시키려는 노력이라면 당장 그쳐야 합니다. ‘수치심’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죄를 반복하지 않게 도와주는 소중한 우리 내면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전화나 인터넷 상으로는 고해성사가 불가능합니다. 고해성사는 오직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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