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9)
대답을 들을 가치가 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마음이 꼬인 이들로서는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지요.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부터 그들의 마음이 어긋나 있었고 저 질문을 듣는 중에도 마음이 어긋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심하게 꼬여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이후에 드러난 모습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처분’할 방안을 모색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에게 드러나긴 했지만 온전히 밝혀지지는 않은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선하신 하느님이 지옥을 마련해 놓을 수 있는가? 그리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걸 지켜볼 수 있는가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진리 앞에서 그 진리가 거북하고 거추장스럽고 도리어 자신에게 아픔으로 작용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악의에 가득한 이들이지요. 그들에게는 오히려 어둠이 기쁨인 셈입니다. 그들은 서로 모략하고 죽이려고 들고 그러한 가운데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서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설명으로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악’을 즐길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이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둠에 빠져 지낼 때에 우리에게는 선과 거룩함이 도리어 거북함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고,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다시금 묻습니다.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말이지요. 그렇게 묻고 또 물으면서 정작 실천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들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답을 들을 가치가 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마음이 꼬인 이들로서는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지요.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부터 그들의 마음이 어긋나 있었고 저 질문을 듣는 중에도 마음이 어긋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심하게 꼬여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이후에 드러난 모습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처분’할 방안을 모색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에게 드러나긴 했지만 온전히 밝혀지지는 않은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선하신 하느님이 지옥을 마련해 놓을 수 있는가? 그리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걸 지켜볼 수 있는가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진리 앞에서 그 진리가 거북하고 거추장스럽고 도리어 자신에게 아픔으로 작용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악의에 가득한 이들이지요. 그들에게는 오히려 어둠이 기쁨인 셈입니다. 그들은 서로 모략하고 죽이려고 들고 그러한 가운데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서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설명으로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악’을 즐길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이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둠에 빠져 지낼 때에 우리에게는 선과 거룩함이 도리어 거북함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고,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다시금 묻습니다.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말이지요. 그렇게 묻고 또 물으면서 정작 실천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들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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