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 2,15-16)
동정심(同情心)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가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자비의 행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상대가 아파할 때에 나도 아파하고 상대가 슬플 때에 나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동정심이고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자비의 행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종종 엉뚱한 일을 겪게 되는 이유 중에는 이 ‘동정심’이 부족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선교지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올바로 잡아내지 못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밀기 시작할 때에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볼리비아를 예로 들자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의 진정한 메세지’입니다. 그들은 한국에 비해서 가난하지만 나름의 삶의 룰이 존재하고 이런 저런 물질적인 것들이 없어 보이지만 자신들의 생활 범위 안에서는 크게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전기도 없는 공소에 노트북이 무슨 소용이며 글도 읽지 못하는데 성경을 쥐어 주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빛을 갈망하고 있으며 그 빛이 전해질 때에 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헌데 부유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은 그들의 물질적으로 가난한 현실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입니다. 몇몇 선교사의 노력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더 지독한 것은 없던 탐욕이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거저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헌데 거저 받는 것을 계속해 나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그것이 그들의 권리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거저 받아서 감사하기는 커녕, 주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지요.
제가 설명하는 것이 제일 위의 성경 구절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가 헐벗고 그야말로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여러분은 그 즉시 여러분들이 가진 것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이, 즉 상대에 대해서 진정한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 채로 나보다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돈을 쥐어 주면 끝난다고 하는 사고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실 비슷한 일이 부자나라의 가정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해 달라는 것을 다 해주곤 합니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관심과 사랑인데 값비싼 옷과 선물로 그것을 채워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녀들은 ‘사랑’에 굶주리고 헐벗는데 전혀 엉뚱한 ‘재화’를 그 사랑의 자리에 끼워 맞춰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 위의 구절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쓰는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 실천을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 무엇이 그에게 가장 필요한 지를 알아내는 노력을 충분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올바르게 상대를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궁핍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는 필요한 것을 당장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급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대부분의 경우, 즉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져 있는 경우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재화가 아니라 바로 ‘복음화’, 즉 ‘신앙’입니다.
동정심(同情心)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가 느끼는 것을 같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자비의 행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상대가 아파할 때에 나도 아파하고 상대가 슬플 때에 나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동정심이고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자비의 행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종종 엉뚱한 일을 겪게 되는 이유 중에는 이 ‘동정심’이 부족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선교지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올바로 잡아내지 못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밀기 시작할 때에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볼리비아를 예로 들자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의 진정한 메세지’입니다. 그들은 한국에 비해서 가난하지만 나름의 삶의 룰이 존재하고 이런 저런 물질적인 것들이 없어 보이지만 자신들의 생활 범위 안에서는 크게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전기도 없는 공소에 노트북이 무슨 소용이며 글도 읽지 못하는데 성경을 쥐어 주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빛을 갈망하고 있으며 그 빛이 전해질 때에 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헌데 부유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은 그들의 물질적으로 가난한 현실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입니다. 몇몇 선교사의 노력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더 지독한 것은 없던 탐욕이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거저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헌데 거저 받는 것을 계속해 나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그것이 그들의 권리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거저 받아서 감사하기는 커녕, 주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지요.
제가 설명하는 것이 제일 위의 성경 구절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가 헐벗고 그야말로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여러분은 그 즉시 여러분들이 가진 것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이, 즉 상대에 대해서 진정한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 채로 나보다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돈을 쥐어 주면 끝난다고 하는 사고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실 비슷한 일이 부자나라의 가정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해 달라는 것을 다 해주곤 합니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관심과 사랑인데 값비싼 옷과 선물로 그것을 채워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녀들은 ‘사랑’에 굶주리고 헐벗는데 전혀 엉뚱한 ‘재화’를 그 사랑의 자리에 끼워 맞춰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 위의 구절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쓰는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 실천을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 무엇이 그에게 가장 필요한 지를 알아내는 노력을 충분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올바르게 상대를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궁핍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는 필요한 것을 당장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급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대부분의 경우, 즉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져 있는 경우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재화가 아니라 바로 ‘복음화’, 즉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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