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4일 본당 봉사자 연수 강의용
물리적 일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는 우리가 한 자리에 모이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일치라고도 할 수 있지요. 수많은 가족들은 같은 집에 모여 살고, 수많은 친구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손쉽게 ‘일치’라고 간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섭니다. 지금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에스트라 세뇨라 아빠레시다라는 본당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서로 흩어져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서로 앙심을 품고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험담하고는 하지요. 따라서 이 첫번째 의미의 일치는 많이 부족한 개념입니다.
정신적 일치
두번째 일치는 생각의 일치, 정신적 일치입니다. 내가 하는 생각이 이러하니 너희도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치이지요.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이 이러니 너희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통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같은 친구는 같은 생각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뜻 맞는 말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생각은 소중한 것이고 저마다 느끼는 것도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가진 성격과 처한 환경에서 느끼는 감정도 서로 다를 수 있고 그것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적극적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소극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유한 환경에 살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마땅히 생각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른 법입니다. 그래서 이 두번째 개념의 일치도 부족한 개념입니다.
영적 일치
세번째 일치는 ‘영의 일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치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향에서 벗어나면 상당히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상 같은 시간과 자리에 모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상 같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같은 영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오직 같은 영을 나눈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어떤 생각을 하건 결국 도달하는 방향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음 속의 가장 근본 의도를 누구에게 내어 맡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나머지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들어진 제안을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제안을 하는 셈이지요. 하느님을 교묘히 제외시킨 제안을 말입니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심지어는 성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결국 이기적인 제안에 불과합니다. 반면 성령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멋이 없고 부족하고 나약하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느님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거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
식별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성령인지 무엇이 악령인지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성령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성령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엉뚱한 생각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리고는 더 다투고 더 시기하고 더 증오하게 되지요. 그러한 것은 전혀 성령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을 올바르게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그를 식별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예수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45) 바로 그가 하는 말과 행동 속에서 그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갈라진 것을 모으려는 사람인지, 그가 겸손한 사람인지, 그가 서로 화해시키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그가 갈라놓는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인지, 서로 싸우게 만드는 사람인지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내어놓는 것을 잘 살펴보면 그의 진정한 인간됨을 알 수 있지요.
회개
회개 또한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죄’라는 것이 끼어있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성령을 받아들일 수도 일치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죄는 우리를 좀먹고 상하게 하고 죽게 만들어 버리지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미리 차지하고 있는 어두움을 걷어내어야 비로소 그 안에 참된 영,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자들에게는 참된 회개가 동반된 ‘고해성사’가 필수적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릇된 모습을 안고 살아가지요. 가장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놓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어두움이 찌꺼기처럼 남아서 다른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봉사자들은 필수적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마음의 청결 안에서 성령께서 바람이 불 듯이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방에는 손님을 모실 수 없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식탁에는 훌륭한 음식을 놓아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실천
성령의 일치는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일치하겠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식별을 실천해야 하고 회개를 실천해야 하며 나아가서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훌륭하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좋았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맙니다.
과연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저마다의 상황마다 다른 것입니다. 사제는 사제 대로의 실천요소가 존재할 것입니다. 보다 하느님과 가까이 머물러야 할 것이고 그렇게 얻은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삶에 다가서야 하겠지요. 수도자라면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마음으로 기도에 헌신하고 스스로를 맑고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신자라면 일상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고 유지해가며 모든 현실로 다가오는 일들을 정성껏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각자는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시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정성껏 모셔야 하고, 여러 사람을 마주하는 직종을 가진 사람은 그들에게 상냥함으로 다가서려고 노력해야 하며, 어떤 기술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은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식별과 회개와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 머무르게 되고 진정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잘 성찰하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룹 과제
- 그룹별로 우리 일상의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가 되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을 성령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방안을 찾고 그것을 연극으로 표현하기. (알콜, 가정폭력, 남성우월주의, 재물에 대한 탐욕, 불륜, 아동 노동 착취, 성폭력, 마약, 조직 폭력, 혼전 임신, 낙태 등등)
물리적 일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는 우리가 한 자리에 모이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일치라고도 할 수 있지요. 수많은 가족들은 같은 집에 모여 살고, 수많은 친구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손쉽게 ‘일치’라고 간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섭니다. 지금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에스트라 세뇨라 아빠레시다라는 본당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서로 흩어져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서로 앙심을 품고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험담하고는 하지요. 따라서 이 첫번째 의미의 일치는 많이 부족한 개념입니다.
정신적 일치
두번째 일치는 생각의 일치, 정신적 일치입니다. 내가 하는 생각이 이러하니 너희도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치이지요.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이 이러니 너희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통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같은 친구는 같은 생각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뜻 맞는 말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생각은 소중한 것이고 저마다 느끼는 것도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가진 성격과 처한 환경에서 느끼는 감정도 서로 다를 수 있고 그것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적극적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소극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유한 환경에 살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마땅히 생각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른 법입니다. 그래서 이 두번째 개념의 일치도 부족한 개념입니다.
영적 일치
세번째 일치는 ‘영의 일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치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방향에서 벗어나면 상당히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상 같은 시간과 자리에 모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상 같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같은 영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오직 같은 영을 나눈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어떤 생각을 하건 결국 도달하는 방향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음 속의 가장 근본 의도를 누구에게 내어 맡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나머지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들어진 제안을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제안을 하는 셈이지요. 하느님을 교묘히 제외시킨 제안을 말입니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심지어는 성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결국 이기적인 제안에 불과합니다. 반면 성령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멋이 없고 부족하고 나약하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느님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거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
식별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성령인지 무엇이 악령인지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성령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성령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엉뚱한 생각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리고는 더 다투고 더 시기하고 더 증오하게 되지요. 그러한 것은 전혀 성령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을 올바르게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그를 식별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예수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45) 바로 그가 하는 말과 행동 속에서 그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갈라진 것을 모으려는 사람인지, 그가 겸손한 사람인지, 그가 서로 화해시키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그가 갈라놓는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인지, 서로 싸우게 만드는 사람인지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내어놓는 것을 잘 살펴보면 그의 진정한 인간됨을 알 수 있지요.
회개
회개 또한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죄’라는 것이 끼어있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성령을 받아들일 수도 일치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죄는 우리를 좀먹고 상하게 하고 죽게 만들어 버리지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미리 차지하고 있는 어두움을 걷어내어야 비로소 그 안에 참된 영,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자들에게는 참된 회개가 동반된 ‘고해성사’가 필수적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릇된 모습을 안고 살아가지요. 가장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놓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어두움이 찌꺼기처럼 남아서 다른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봉사자들은 필수적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마음의 청결 안에서 성령께서 바람이 불 듯이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방에는 손님을 모실 수 없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식탁에는 훌륭한 음식을 놓아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실천
성령의 일치는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일치하겠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식별을 실천해야 하고 회개를 실천해야 하며 나아가서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훌륭하고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좋았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맙니다.
과연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저마다의 상황마다 다른 것입니다. 사제는 사제 대로의 실천요소가 존재할 것입니다. 보다 하느님과 가까이 머물러야 할 것이고 그렇게 얻은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삶에 다가서야 하겠지요. 수도자라면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마음으로 기도에 헌신하고 스스로를 맑고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신자라면 일상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고 유지해가며 모든 현실로 다가오는 일들을 정성껏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각자는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시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정성껏 모셔야 하고, 여러 사람을 마주하는 직종을 가진 사람은 그들에게 상냥함으로 다가서려고 노력해야 하며, 어떤 기술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은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식별과 회개와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 머무르게 되고 진정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잘 성찰하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룹 과제
- 그룹별로 우리 일상의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가 되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을 성령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방안을 찾고 그것을 연극으로 표현하기. (알콜, 가정폭력, 남성우월주의, 재물에 대한 탐욕, 불륜, 아동 노동 착취, 성폭력, 마약, 조직 폭력, 혼전 임신, 낙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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