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성경 강의를 마치고 질문을 받는데 한 신자분이 물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도 용서가 나오는데, 용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건가요?”
“용서는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지요. 하지만 용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지요.
무엇보다도 용서는 ‘거래’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용서를 떠올리면서 거래를 함께 떠올리지요. 무슨 소린가 하면 상대가 나에게 이런 저런 잘못을 했으니 그것을 기워 갚으면 비로소 용서해 줄 수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거래’이지요. 만일 상대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모조리 기워 갚는다면 그것으로 끝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용서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용서가 아닙니다. 상대는 이미 채무를 갚은 것일 뿐이니까요.
참된 용서는 예수님이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었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에게 청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모습이 진정한 용서를 대변합니다. 참된 용서는 그야말로 잘못한 이 앞에서 그 잘못을 마치 없던 것처럼 용서해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받는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려고 든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받는 것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인지하고 파악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엄청난 선물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오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매일 매일 새로운 삶을 선물하시지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지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에게도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매일 천억원을 받는 사람이 만원 정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테지요.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매일같이 받는 축복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도 용서가 나오는데, 용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건가요?”
“용서는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지요. 하지만 용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지요.
무엇보다도 용서는 ‘거래’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용서를 떠올리면서 거래를 함께 떠올리지요. 무슨 소린가 하면 상대가 나에게 이런 저런 잘못을 했으니 그것을 기워 갚으면 비로소 용서해 줄 수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거래’이지요. 만일 상대가 나에게 잘못한 것을 모조리 기워 갚는다면 그것으로 끝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용서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용서가 아닙니다. 상대는 이미 채무를 갚은 것일 뿐이니까요.
참된 용서는 예수님이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었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에게 청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모습이 진정한 용서를 대변합니다. 참된 용서는 그야말로 잘못한 이 앞에서 그 잘못을 마치 없던 것처럼 용서해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받는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려고 든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받는 것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인지하고 파악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엄청난 선물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오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매일 매일 새로운 삶을 선물하시지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지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에게도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매일 천억원을 받는 사람이 만원 정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테지요.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매일같이 받는 축복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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