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47)
고해성사는 그 예식 자체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이는 자신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크든 작든 죄를 짓고 그것을 고해소 안에서 사제에게 부끄러움을 감수하며 털어놓고 보속을 받아 그것을 완수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전형적인’ 가톨릭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의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만큼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우리가 사랑하고 자신을 헌신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나를 내어 바치는 만큼 나는 용서받았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의 죄책을 최소화하고 간소화 해서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을 즐깁니다. 때로는 정말 엄청난 죄를 짓고도 고해만 보면 끝난다는 식으로 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천상의 기회, 즉 사랑의 기회를 사정없이 내쳐 버리기도 합니다.
용서는 사랑의 드높은 단계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용서하는 것은 그 자체로 드높은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의 용서를 바라지만, 문제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어버리고 말지요. 우리가 받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다가오는 사랑을 받기만 하고 내어줄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은 그 안에서부터 썩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들이 실천한다고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요? 우리는 매일 저녁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랑은 나 자신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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