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6)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바램입니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좋게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과연 내가 그 ‘좋음’에 합당한 사람인가 하는 것과 나아가 그들이 좋아하는 부분이 과연 정말 좋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좋다’는 의미일까요? 여기에는 사실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 노선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저마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은 분명합니다.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 정의와 공정을 펼치며 가난한 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학적’으로만 알지 실천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저마다 좋은 것’을 추구하지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일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심보가 가득 들어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그저 눈 앞에 드러나는 결과만 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정하는 진정한 좋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분한 훈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인내로운 사람’이 좋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 인내라는 것은 오랜 영적 훈련을 거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일에 용기있게 나서는 사람이 좋다고 한다지만 엉뚱한 곳에서 정의를 부르짖고(인터넷 상에서) 실제 용기를 내어야 할 부분에서는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면 그는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닌 셈이지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좋다지만 실제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역겨움을 느낀다면 그는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과연 그 ‘좋음’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성찰하더라도 대부분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바로 그 ‘좋은 사람’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두번째로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때 한국에서 ‘얼짱 강도’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강도는 강도인데 그 지명수배 사진이 너무 이쁘게 나와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큰 분별 없이 대상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변덕스럽기도 해서 금새 질려 하지요. 사람들의 인기라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유명한 대중가요를 좋아합니다. 잘생기고 멋진 것을 좋아하고 호화스럽고 화려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지요. 그러니 그런 그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려 하다가는 나 자신이 피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대와 요구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다보면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상실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고유성이 상실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는 엔돌핀이 극도로 치솟다가 그 환호가 사라지고 나면 엄청난 공허가 다시 자신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라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모두 우리의 친구가 되고, 반대로 그리스도와 적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도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와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바램입니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좋게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과연 내가 그 ‘좋음’에 합당한 사람인가 하는 것과 나아가 그들이 좋아하는 부분이 과연 정말 좋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좋다’는 의미일까요? 여기에는 사실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가지 노선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저마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은 분명합니다.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 정의와 공정을 펼치며 가난한 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학적’으로만 알지 실천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저마다 좋은 것’을 추구하지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일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심보가 가득 들어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그저 눈 앞에 드러나는 결과만 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정하는 진정한 좋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분한 훈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인내로운 사람’이 좋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 인내라는 것은 오랜 영적 훈련을 거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일에 용기있게 나서는 사람이 좋다고 한다지만 엉뚱한 곳에서 정의를 부르짖고(인터넷 상에서) 실제 용기를 내어야 할 부분에서는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면 그는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닌 셈이지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좋다지만 실제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역겨움을 느낀다면 그는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과연 그 ‘좋음’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성찰하더라도 대부분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바로 그 ‘좋은 사람’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두번째로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때 한국에서 ‘얼짱 강도’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강도는 강도인데 그 지명수배 사진이 너무 이쁘게 나와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큰 분별 없이 대상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변덕스럽기도 해서 금새 질려 하지요. 사람들의 인기라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유명한 대중가요를 좋아합니다. 잘생기고 멋진 것을 좋아하고 호화스럽고 화려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지요. 그러니 그런 그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려 하다가는 나 자신이 피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대와 요구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다보면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상실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고유성이 상실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는 엔돌핀이 극도로 치솟다가 그 환호가 사라지고 나면 엄청난 공허가 다시 자신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라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모두 우리의 친구가 되고, 반대로 그리스도와 적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도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와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