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교사의 어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얼마 전부터 해당 교리교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기를 원했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망자는 마지막까지 회복과 삶의 희망을 간직한 채로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망자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을지, 그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어떠했을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병자성사과 고해성사를 통해서 분명한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의 표지를 얻을 기회를 접하지 못하고 자신이 정해놓지 않은 순간에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한 번 거부하면 그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느님을 회복하는 데에 더 많은 힘을 쓰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지금 해야 할 과제를 미뤄 놓으면 나중에 그것을 따라잡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소비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것들을 미뤄두다가 마지막에 밤새기로 해낼 가능성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그건 마치 여러가지 운이 겹친 성공 신화들과 같은 것이지요. 진정한 성공은 한 사람의 내면에 성실성과 책임감이 존재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요행’을 바라다가 성공한 사람들이 전면에 비춰지고 반대로 쫄딱 망한 사람은 결코 주목받지 못하기에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성공 신화를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 자신들도 그런 기회를 꿈꾸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것도 꾸준한 움직임이 필요한 일생의 과업입니다. 헌데 이를 미뤄두고 미뤄두다가 죽기 직전에 요행을 얻어서 회개하고 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안일한 생각이지요. 헌데 그런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자신의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노력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셈이지요.
왜 다들 그렇게 영적인 여정을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줄은 알면서 자신의 영혼의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은 왜 그리 소홀히 할까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장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만을 보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 ‘하느님’, ‘영원한 생명’, ‘구원’과 같은 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반면 ‘육신’, ‘돈’, ‘권력’, ‘명예’와 같은 것은 철저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일한 우리들이고 가련한 우리들입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이런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그 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건만 여전히 예수님은 많은 이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다들 예수를 그 유명세로만 알아보고 그 진실한 의미를 찾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한 번 거부하면 그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느님을 회복하는 데에 더 많은 힘을 쓰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지금 해야 할 과제를 미뤄 놓으면 나중에 그것을 따라잡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소비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것들을 미뤄두다가 마지막에 밤새기로 해낼 가능성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그건 마치 여러가지 운이 겹친 성공 신화들과 같은 것이지요. 진정한 성공은 한 사람의 내면에 성실성과 책임감이 존재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요행’을 바라다가 성공한 사람들이 전면에 비춰지고 반대로 쫄딱 망한 사람은 결코 주목받지 못하기에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성공 신화를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 자신들도 그런 기회를 꿈꾸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것도 꾸준한 움직임이 필요한 일생의 과업입니다. 헌데 이를 미뤄두고 미뤄두다가 죽기 직전에 요행을 얻어서 회개하고 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안일한 생각이지요. 헌데 그런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자신의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노력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셈이지요.
왜 다들 그렇게 영적인 여정을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줄은 알면서 자신의 영혼의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은 왜 그리 소홀히 할까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장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만을 보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 ‘하느님’, ‘영원한 생명’, ‘구원’과 같은 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반면 ‘육신’, ‘돈’, ‘권력’, ‘명예’와 같은 것은 철저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일한 우리들이고 가련한 우리들입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이런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그 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건만 여전히 예수님은 많은 이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다들 예수를 그 유명세로만 알아보고 그 진실한 의미를 찾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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