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카 6,39)
공소에 한 자매는 저만 보면 속이 상하다고 토로를 합니다.
“신부님, 신자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뭔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그렇지도 않구요. 저마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아가요.”
제가 대뜸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자매님부터 스스로 챙기세요. 먼저 자매님 안에 침착함을 회복하세요.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다른 이들을 돌볼 수 있어요. 그러지 않고 스스로에게 평화가 없는데 다른 이를 돕겠다고 나서다가는 오히려 망쳐 버리고 마는 거예요.”
우리는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을 느끼는 데에 특화되어 있지요. 하지만 그 이상은 미숙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요.
많은 이들이 이 미숙함으로 일을 도로 망치곤 합니다. 자신은 신앙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결국 실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접하고는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가장 먼저 우리가 수용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올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서 잔뜩 교만해져서 실제로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일을 마구 건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인도하는 눈먼 이는 불행합니다. 자신과 더불어 자신이 이끄는 사람마저도 구덩이에 빠뜨리는 격이니까요.
공소에 한 자매는 저만 보면 속이 상하다고 토로를 합니다.
“신부님, 신자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뭔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그렇지도 않구요. 저마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아가요.”
제가 대뜸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자매님부터 스스로 챙기세요. 먼저 자매님 안에 침착함을 회복하세요.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다른 이들을 돌볼 수 있어요. 그러지 않고 스스로에게 평화가 없는데 다른 이를 돕겠다고 나서다가는 오히려 망쳐 버리고 마는 거예요.”
우리는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을 느끼는 데에 특화되어 있지요. 하지만 그 이상은 미숙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요.
많은 이들이 이 미숙함으로 일을 도로 망치곤 합니다. 자신은 신앙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결국 실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접하고는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가장 먼저 우리가 수용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올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서 잔뜩 교만해져서 실제로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일을 마구 건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인도하는 눈먼 이는 불행합니다. 자신과 더불어 자신이 이끄는 사람마저도 구덩이에 빠뜨리는 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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