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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과 섬김

폭력과 억압은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누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순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힘이 지배하는 순간까지일 뿐입니다. 언제든지 그 힘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을 더욱 더 추구하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눌렸던 용수철이 더한 힘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폭력과 억압은 사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에게 반대 방향의 힘을 더욱 실어주게 됩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다스리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평화롭고 온유하며 유순하고 친절하고 겸손합니다. 바로 그 힘이 다른 이를 진실한 길로 이끄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오면서 힘의 논리에 어느새 중독되어 버린 형국입니다. 그래서 손쉽게 ‘힘’으로 타인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돈과 명예, 권력과 미모가 언제나 인간에게 매혹적인 이유는 그 안에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힘을 지닐 수 있고 타인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한 번 맛들이게 되면 중독되기 시작해서 벗어나기가 힘이 드는 법입니다.

진정으로 겸손해 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겸손해진다는 것은 진정한 힘의 주인을 깨달아서 그분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가장 위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섭리를 믿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든 드러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겸손’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참된 봉사는 오직 진정한 겸손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봉사하는 시늉’을 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봉사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들은 억지로 억지로 잠시 자신을 낮출 뿐, 진정으로 가난한 이와 한 형제가 되어 어울리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고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이 억압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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