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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 1장



마르코 1장

새로운 성경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부터 마르코 복음을 파고들어간다.

마르코복음은 짧으니만큼 핵심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다.
1장을 아우르는 주된 내용은,
"요이~ 땅!"이다.
본격적인 달리기를 위해서 준비하고 그 첫걸음을 걷는 과정이 잘 담겨져 있다.

먼저 요한이 나타나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작업을 한다.
군대에서 '나라시'를 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튀어나온 건 깎고, 부족한 건 채운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죄와 교만의 모난 부분은 깎고, 잃었던 영적인 힘을 채워야 한다.
주님이 오시는데, 나의 어두움을 계속해서도 안되고,
너무 처져 있어도 안된다.
깎고 채워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다.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간단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는 걸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걸 버려야 했다.
우리 역시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 버림이 모든 걸 가차없이 내던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도록 하자.
고기낚는 '어부'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들이 하는 일에는 바뀐 게 없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하는 일을 계속 하되 그 근본 방향을 바꾸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응답을 해야 한다.
뭔가 다른 인격이 되라거나 다른 환경에 무턱대고 뛰어 들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과 응답은 따로 주어진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상 안에서 부르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시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이는 율법학자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율법학자들은 쉬운 걸 어렵게 만들고, 자신들은 행하지도 않는다.
오늘날도 많은 곳에서 이런 이들을 관찰할 수 있다.
말만 많고 행하지 않는 이들.
괜히 쉬운 걸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이들.
예수님은 삶 속에서 가르치셨고, 그분의 말은 힘이 있었다.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악마를 쫓아내는데,
악마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많은 헛 신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살지는 않는다.
그들은 매번 이런 저런 규정들을 들이대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마저 앗아가려 한다.
그들은 '마귀들린 사람들'이다.
마귀들은 인간의 제약과 불행을 사랑한다.

치유는 사탕이다.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서 사람들을 어루만지셨고
손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복음의 첫 과정은 언제나 달콤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처음부터 초심자들에게 큰 짐을 지우지 않도록 하자.
충분히 그들이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게 하고,
나아가서 그 뒤에 조금씩 진도를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처음부터 어른들이 먹는 단단한 음식을 주면,
먹기도 전에 도망가 버리게 된다.

기도는 예수님의 양식이었다.
기도는 당신의 숨쉬기였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대화하셨고,
기도를 통해서 힘과 방향을 얻으셨다.
당신은 얼마나 대단한 누구길래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신앙을 논하는가?

예수님은 치유를 할 때,
언제나 그의 기준에 맞춘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이루어질 치료이지만,
나환자에게 손을 뻗어 그를 만지면서 친히 들으라고 말씀까지 해 주신다.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을 위해서 다가가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에로 얼마나 다가서 주는가?
혹,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들이밀고 있는 건 아닌가?
사제들이나 수도자들, 교리교사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원래는 2장도 해야 하는데...
글 쓸 시간이 촉박하다.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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