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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생명의 빵 Part II

세상의 빵에 관심 가진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물에다 기름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마디로 별 소용없는 짓이라는 이야기다.

실컷 설명을 하고는 돌아서면 어느새 분리가 되어 있는 물과 기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는 게 더 쉬울 듯 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의 빵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세상의 빵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대중의 관심사를 말한다.
돈, 명예, 권력...
누구든 부자가 되려 하고, 누구든 잘 알려지려 하고, 누구든 힘있는 사람이 되고파 한다.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이런 원의들을 잘 감춘다고 해도,
결국엔 이 세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게 뭔가를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그 근본에 무엇을 원하는가?
'내 뜻이여 온세상 끝까지 이루어지소서'라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모습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가?
진정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 보았는가?
크게 어렵지 않게 '행복' =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도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버는 이유가 그렇게 번 돈으로 걱정거리를 양산하려고 버는 사람은 없다.
돈을 벌면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금 고민하는 일들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들 노력하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날 알아봐주면,
행복하니까 그걸 원하는 거다.
현상수배범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권력을 가져서 상대파 갱들로부터 총맞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안 죽으려고 기를 쓰면서 이러한 것들을 찾는다.

'내가 원하는 것' = '행복' = '내 현세의 삶을 채우는 것들'
대충 이런 도식이 완성된다.
그래 이해한다.
우리 육체의 눈으로 볼수 있는 선에서는 이게 최고이긴 하다.
ㅎㅎㅎ

이 쯤 왔으면 이제 생명의 빵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런 도식이 좀 멋적어 보인다거나,
그닥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죽음'이란 걸 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라거나,
뭔가 이 답답한 틀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제 생명의 빵이 등장할 차례이다.

이들 역시도 '행복'이라는 걸 찾는다.
하지만 이들이 찾는 행복은 좀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채우는' 행복이 아니라.
'진정 행복한 분에게서 얻는' 행복을 찾는다.
참 행복은 끝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부류다.
세상 안에서 얻는 것은 다 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부류이다.
결국 우리 인간은 얻어놓은 모든 것을 놓고 떠나간다는 걸 배우는 부류,
살아가면서 조금씩 가졌다고 생각했던 걸 잃는다는 걸 배운 부류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행복'을 다른 원천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들이 만난 분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진정한 행복을 지니고 있다.
이분에게 가까이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그분의 참된 행복의 원천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려는 것이 바로 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그분의 '몸과 피'이다.
그분을 먹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이들.
그게 육체적 빵이 아니라는 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들 아는 사실이다.
그분의 빵을 먹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실제의 살을 먹어야 한다.
말씀의 잔치에 참여하고 그분의 식탁에서 변화된 그분의 살을 먹어야 한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지만,
똑같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을 좀 바꾸자면,
그분을 먹은 사람답게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 하면서 타인에게 복수하려 한다던지,
죽으면 죽었지 용서는 못하겠다고 하는 이들...
그분을 먹은 적이 없는 케이스다.
반대로 그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분과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세상을 지으신 분이 있다는 걸 아는 이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
형제의 어려움을 살피는 이들...

에이... 너무 추상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싫다.
예수님하고 살아라.
그 뿐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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