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는 남녀의 관계가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부부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부부관계는,
'한 몸'이라는 개념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부부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한 몸의 다른 두가지 드러남이다.
그래서 이런 식의 행동은 존재할 수 없다.
"아, 나 오늘 회식 있으니까 저녁은 알아서 먼저 먹어."(통보)
대신에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오늘 회식 있는데, 가도 괜찮을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동의)
자기 몸 왼쪽이 어딜 나가지 않으려는데 오른쪽이 혼자 절름대며 나다닐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부관계는 닫혀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내 몸을 반을 갈라서 어디 내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닫힌 관계를 올바르게 완성할 때, 비로소 화알짝 열릴 수 있다.
내 안에 가진 게 없는 데 내어준다는 건 거짓말이다.
부부 사이가 틀어져 있는데 사회적으로 위신있는 척 해봐야 될리가 없다.
최선을 다해서 부부관계를 완수하라.
남편은 아내를 더할나위없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지극히 존경하라.
그러면 저절로 그 열매가 익어 남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에 대한 후반부 이야기는
예수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마치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양 착각하기 쉽다. 지금 내가 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 번 시도해 보자면...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함께 지내는 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면서 하신 생각이다.
고자가 되는 건 '별다른' 케이스이다.
이 '별다른'이라는 말의 의미는 좋을 수도, 그냥 평이할 수도, 때로는 나쁠 수도 있다.
이 '별다른' 고자가 좋은 케이스라면,
그는 하느님과 친밀하다.
하지만 이 '별다름'을 꼭 고자로 찾을 필요는 없다.
다른 '별다른' 이들이 있으며 이들 역시 하느님과 친하다.
그들은 특별한 봉헌생활로 세상 안에서 거룩한 이들로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대부분의 이 '별다른' 고자들은 스스로를 들어높이며,
마치 자신의 별다름이 자신의 신분을 자동으로 상승시켜준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는 비단 한 부류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 문화적으로 그런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많다.
이때의 '별다른'은 '나쁜'의미로 작용한다.
바로 '교만'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고자됨'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이들은,
지극히 일부분, 즉 허락된 이들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마치 무슨 족쇄라도 찬 듯이 살아간다.
언제라도 풀릴 기회가 있으면 풀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족쇄.
이정도에서 끝내야겠다.
다른 기회가 또 있을테지.
젊은이들이여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시라.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느님의 더 친근한 부르심을 느끼는 자들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다가오라.
하늘나라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천사가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