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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와 가톨릭



개신교와 가톨릭 - 같은 것에 주목하기

정말 어릴 때는 개신교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부모님을 따라가면 성당이었고, 거기에는 신부님이 있었고,
그래서 복사단이 되고 싶었고, 복사단이 되어 열심히 활동했다.

철이 좀 들면서,
다른 친구들이 '성당'이 아니라 '교회'를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같은 유일신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때 내 친한 친구는 자기 교회의 성탄 연극제에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 조금은 생경한 분위기를 호기심을 잔뜩 안고 지켜보았다.
젊은이들은 그 교회 안에서 생기발랄했고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주일학교 안에서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배웠고,
개신교회는 본 줄기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가르침,
그리고 개신교 사람들은 보통은 가톨릭, 천주교를 '성모님교'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과
큰 근거없이 '막연히' 가톨릭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쓰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괜히 영화 자막에서 '하나님'이 나오면 좀 꺼려지곤 했다.
막연한 거리낌의 시기였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배우면서
가톨릭의 당시의 부패와 오류를 듣게 되었고,
개신교 형제들이 당시로서는 하느님께 더 나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다 보니 두 교회가 갈라서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군대에서 교회 행사를 한다고 해서 사병들을 대동한 적이 있어,
또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고, 이쁜 여대생들의 율동찬양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교회는 생동감이 있고 살아 있었다.
이네들의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그 아름다운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곳 볼리비아에 와서도 간간이 교회 건물들을 만나게 되고,
일상생활에서 간간히 개신교 형제들을 마주하게 된다.
서로 다른 토양 안에서 자라온 터라,
둘이 인간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기엔 벌써 뻗어있는 가지들이 너무 많고, 서로들 그걸 희생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물과 같은 태양빛을 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숨쉬고 있는 상대가 어디 외계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결국 같은 곳에서 나왔고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가 가진 소중한 유산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하느님' 말마디로부터 싸우기 시작하면 답은 없다.
어차피 영어로는 God이고 스페인어로는 Dios일 뿐이거늘,
한국은 지나치게 속좁게 놀고 있는 느낌이다.

서로를 비난하는 화살을 그만두고 함께 걸어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왜냐면, 둘이서 서로 으르렁대며 시간을 허비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근거로는 이 한 구절이면 충분할 듯 싶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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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