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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잃었다?


"세례를 통해서 은총과 신앙을 얻지 않습니까?
헌데 그 신앙을 잃을 수도 있습니까?"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한 아저씨가 성경강의 중에 한 질문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앙이라는 것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얻었다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런 표현들을 많이 쓰곤 한다.
'믿음을 잃었다.'
과연 믿음은 가졌다가 잃을 수 있는 것인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보자.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져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믿음이란 건 대단한 모양이다. 믿음의 능력은 산을 옮길 수 있단다.

문제는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런 상상을 해보자.
한 아이가 산골에만 살아서 '인터넷'이라는 걸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도심지에 나와서 인터넷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과 눈 앞에 마주하듯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이 체험을 꿈이고 환상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아이의 이 체험은 영원히 남아서 산골로 돌아가서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걸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분과 더불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며 자신이 믿는 바를 체험하는 것이다.'
일단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벗어날 수가 없다.
애써 피하고 도망다닐 수는 있지만, 제자리 걸음이다.
요나가 그러했고,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러했다.
심지어는 그 유명한 엘리야 예언자도 너무 힘든 나머지 자신의 사명을 포기할 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믿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믿음은 잃을 수 있는 것인가?

믿음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전적인 방향전환,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을 의미한다.
세상이 물질 중심이고 나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이고 물질을 넘어선 보다 높은 차원이 있다는 걸 상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인간이 일단 이 여정에 들어서고나면 도망칠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은 잃을 수 있는 것인가?

"믿음을 '제대로' 가진 사람은 잃을 수 없다."

그것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그릇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다.
성당 사람은 다 착한 줄 알았던 믿음,
신부님들은 모두 거룩한줄만 알았던 믿음,
예수님은 마냥 나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는 분인 줄 알았던 스스로의 믿음,
신앙생활을 하면 고통은 사라지고 언제나 영적 물적 즐거움은 가중된다고 생각했던 믿음.
많은 이들이 신앙을 믿음을 잃었다고 표현할 때에,
결국 그들이 잃은 건, 믿음의 허상일 뿐이다.

믿음은 우리의 가장 밑바탕을 깔게 된다.
그래서 모든 걸 잃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바탕을 선물하고(희망)
하느님이라는 끊임없는 샘에서 나오는 사랑을 타인에게 무제한으로 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사랑).
결국 이 세 가지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ㅎㅎㅎ
사랑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끊이지 않는다.

진도를 조금만 더 나가자.
세례는 무엇인가?
성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확정하는 것이다.
세례성사는 신앙의 길에서 새로이 태어남을 물과 사제의 선포와 기름바름으로 확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옛 인간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세례'를 받았다는 걸 스스로 기억해서 인지하던지,
아니면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줘서 알고 있던지,
일단 자신의 뇌리 속에 '세례'가 올바르게 자리 잡으면,
신앙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 그에겐 믿음이 확정된 것이고 결코 멸망하지 않는가?"
예컨대 어느 신부님이 환속을 했다.
그는 믿음을 잃었고 영원한 지옥불에 시달릴 것인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거니와
그건 하느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당신은 당신의 구원이나 걱정하라.
하지만 믿음은 손에 쥐고 있는 어떤 결정된 사물이 아니라,
"꾸준한 응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창녀와 죄인들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다.

믿음의 허상을 버려라.
그리고 보다 본질적인 믿음의 단계로 들어가라.
내 등 뒤에 1천억원짜리 돈자루가 있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누가 내 주머니에 든 만원을 훔쳐간다손 치더라도,
씨익 웃어줄 수 있는 여유는 생길 것이다.
이게 믿음을 지닌 사람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환장하는 이유이며,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이 언제나 기쁨 가운데 슬픔을 지닐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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