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암흑 속에서 주님을 찾기


암흑 속에서 주님을 찾기

하느님께서 신앙의 길을 나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내게 택하신 방법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암흑'이었다.
사실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마주한 현실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더 이상 '표징'은 없다.
오직 "당신의 말씀과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으려 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감각" 앞에 놓인 것만 수용한다.
눈이 보는 것,
귀가 듣는 것,
냄새,
촉감,
맛...

그렇게 그저 우리의 오감을 채워주는 것들만을 확신하며 믿는다.
그들에게 감각의 저편에 있다고 전해지는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지극히 단순한 논리인거다.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세상은 학교, 놀이터, 집에 한정된다.
그 밖의 공간은 생각을 펼쳐본 적도 없다.
처음 롤러 스케이트 장에 갔을 때의 그 생경한 느낌이란...
겪어 보기 전까지는 거기에 도착하는 동안 이야기를 전해주는 형의 말을 믿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늘 여러가지 것들로 나를 속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신앙의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의심함과 동시에 그가 말하는 '신앙'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늘 처한 상황이다.
이 상황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사람들은 "교회의 현실"이 미더워서 그 교회가 간직한 보물인 "신앙"을 저버렸다고들 한다.
교회의 결함이 싫어서 신앙에 다가서기 싫다니,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는 속담과 다를 바 없다.
인간적인 불만을 해소하겠다고 신앙의 근본에서 멀어지는 꼴이라니,
벼룩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신앙이 뭔지 맛도 보지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어쩔 것인가?
교회의 어두움은 늘 상존해 왔는걸.
가톨릭 교회의 그 어두움이 싫다고 새롭게 시작한다고 한 개신교 조차도
그들 내부에 새로운 부족함과 어두움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 가운데 눈을 뜬 '하느님의 자녀들'이 존재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
"고통"의 의미를 아무리 세상의 자녀들에게 설명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들은 일정기간이 지나 이 세상 안에서의 특정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고통은 필연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정반대로 하느님의 자녀들은
묵묵히 고통을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이
무턱대고 모든 고통을 좋아할 거라고는 착각하지 말자.
하느님의 자녀들 역시도 세상의 자녀들만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끝났을 때에는
더욱 큰 보이지 않는 희망 속에서 그 고통을 수용한다.

우리가 지닌 신앙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아 두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에게만 이 징표를 예비해 두셨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징표를 본 이들이 행복할 거라는 건 큰 착각이다.
그들이 징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다가온 극심한 암흑 속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믿을 거리를 주면 믿겠소'라는 거래 따위는 하지 않았다.
간사한 우리의 맘으로 하느님의 위대함을 시험하려 들지 말자.
'인간의 일'은 아무리 큰 것이라도 하느님에게는 가소로운 것이며,
오직 가장 큰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말들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5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저 무슨 얼빠진 소리야? 무슨 특별한 모임에 소속되어서 정신을 잃어가나?'라고 의심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뭔가를 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사도행전 4장 13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14장 15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군중들에게 이렇게 부르짖는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