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첨병 사제 - 해외편 ‧ 마진우 요셉 신부
2005년 사제수품. 대구 범어, 고산본당을 거쳐 2008년 6월 24일 남미 볼리비아 선교파견. <- 이 내용이 맞는지요? 또 현재 사목하고 계신 본당 명을 알려주세요.
볼리비아 산타 크루즈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처음 파견된 본당은 Cristo Salvador(구원자 그리스도)본당이었고,2013년도부터 지금까지 Nuestra Señora Aparecida(우리들의 아빠레시다 성모님: 브라질의 주보 성인) 본당에 있습니다.
Q. 청소년시절 신부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만화 그리는 것은 언제부터 좋아하셨는지? 혹시 만화가를 꿈꾼 것은 아니셨는지요?
청소년 시절에는 별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정말 장난꾸러기였지요. 처음에는 구미 신평동에 살았는데 살던 아파트 앞에 논이 있어 거기에서 개구리도 잡고 송사리도 잡고, 아파트 공원에서 잠자리도 잡고 했었습니다. 한번은 개구리를 한 양동이를 잡아다가 욕조에 넣어두었다가 어머니에게 된통 혼난 적도 있지요. 그러다가 대구로 이사를 갔는데 환경이 급격하게 변한 나머지 그때부터 지극히 내성적인 아이로 성격이 변했지요. 자연과 노는 것을 좋아하고 여전히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촌동네 아이가 대구 사투리를 쓰는 아스팔트 가득한 도시와 세련된 아이들 사이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래서 성당에 더 마음을 두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성당은 시골이고 도시고 가리지 않고 같은 신앙으로 같은 미사를 드리고 어울려 놀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별다를 것 없이 조용한 아이였지만 성당에서만큼은 기를 펴고 살았습니다. 이미 예비 신학생이던 고2때 성당 친구들과 댄스 그룹을 조직해서 성탄 가요제에 나간 적도 있었지요. 그때 교리교사를 하던 형 친구가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형에게 ‘쟤가 신학교 간다는 그 애 맞냐?’고 할 정도였지요.
Q.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특별한 부르심 일화가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
특별한 감동적인 일화 같은 것은 없습니다. 고1때부터 시작해서 어머니의 권유로 성소모임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뭔가 하면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성소모임을 성실하게 나갔고 결국 별다른 저항감 없이 자연스럽게 신학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어서 신학교를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를 서울의 유능한 대학에 치면 거뜬하게 붙을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당시 신학교 커트라인은 저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수준이었고 그래서 같이 신학교 들어가기를 준비하던 한 친구와 함께 서울의 이 대학 저 대학에 장난식으로 모의고사를 쳐보곤 했지요. 물론 신학교를 들어가는데에 아무런 내적 결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제’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삶(독신, 봉헌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가고 싶었습니다. 청소년기에 여러 어른들을 보면서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또 고등학생 때에는 우연한 계기로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참으로 설레었지만 너무나 어렸던 탓인지 시간이 갈수록 흥미가 떨어졌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체험들 속에서 신학교를 간다는 것이 저로서는 별다른 큰 결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Q. 신학교 시절 혹은 사제를 꿈꾸면서 신부님께 영향을 끼친 롤모델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분과의 잊지못할 일화, 인상깊던 가르침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사제로 살아가는 지금 어떠한 힘이 되어주고 있는지 등등)
예수님 말고는 특정한 인물을 롤모델로 삼아본 적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반대의 경우가 있긴 했지요. 신학생으로 지내던 어느 날 어느 본당 신부님의 어린이 미사 강론을 들으면서 ‘아, 나는 저렇게는 강론하면 안되겠다.’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있습니다. 생기발랄한 초등학생 아이들을 앞에 앉혀두고 따분한 신학 서적을 요약한 듯한 강론을 하는 모습에 역으로 배운 셈이랄까요? 그것이 아마 지금의 제 모습을 형성한 계기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정말 강론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의미의 롤모델을 말하자면 ’준주성범’을 신학교 1학년때부터 즐겨 읽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늘 곁에 두고 있는 책이지요. 짧지만 메세지의 농도가 깊고 아직까지도 배울 내용이 많은 책입니다.
Q. 서품성구가 성경 어느 한 구절이 아니라 “겸손, 기도”(맞나요? ^^a)이시던데, 어떠한 마음으로 저 단어를 선택하셨는지요? (만약 서품성구가 따로 있으시다면 밝혀주시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신학교 시절 읽은 영성서적 대부분에서 겸손과 기도의 두 가지 핵심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구를 정해야 할 때에 성경구절보다는 핵심적인 그 두 단어로 정했지요. 성구라는 것이 평생을 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특별히 나에게 부족한 점을 늘 상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겸손과 기도는 제가 이미 그것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저에게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선택을 한 것이지요. ’겸손과 기도’가 정확한 제 성구 양식인데 페이스북에 한글로 5글자를 넣을 수가 없어서 ‘겸손기도’라고 한 것이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습니다.
Q. 처음 볼리비아로 파견 받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신부가 되고 해외선교 파견을 예상해 본 적이 있으셨나요?
볼리비아 선교는 사실 제가 자진해서 신청한 것이었습니다. 신부가 될 당시만 해도 제가 해외에 선교사로 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제생활을 하던 중에 지역 모임에서 신청자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2007년도에 신청자를 받을 때에 주저함 없이 신청을 했지요. 물론 볼리비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거기서 스페인어를 쓴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겁없이 그런 신청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2007년도에 신청했을 당시에는 거의 제가 가는 것으로 확정되었다가 다른 신부님이 먼저 파견되었지요. 그래서 그 뒤에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2008년도에 새 본당에 보좌로 파견되어 열심히 하려는 찰나에 다시 저를 부르더군요. 그래서 오게 되었습니다.
Q. 현재 하고 계신 볼리비아 선교 활동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선교라고 하는 것이 뭔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언어와 문화’ 안에서 동일한 사목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한국의 신부님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주일과 평일 미사를 드리고 그 외의 다른 성사들을 준비하고 거행하고 그 밖의 여러가지 축복식이나 장례와 같은 준성사 행위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요구를 듣고 도와주고 나아가 봉사자들을 조직하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앙교육을 제공합니다. 다만 그것을 전혀 다른 언어와 환경 안에서 이루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 남다를 뿐이지요. 하지만 언어와 환경이라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 결국은 익숙해지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선교사의 마음이 참으로 중요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선교 기간이 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극적인 삶의 모습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볼리비아 선교가 특별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사제로서의 능력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국이라면 언제나 신자들의 바운더리에 둘러싸여 기본적인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고 점점 익숙해져가는 것이겠지만 이곳에는 가장 우선적으로 ‘언어’라는 장벽과 ‘문화’라는 장벽 때문에 사제이지만 지극히 낮은 위치에 처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이곳의 언어를 하나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워야 하는 위치에 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겸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셈입니다. 하다못해 6살 짜리 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곤 하지요. 만일 어느 선교사가 이런 기본적인 겸손함이 없이 ‘내가 그래도 사제인데.’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그는 결국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게 됩니다.
나아가 여러가지 어려움들 속에서 사제로서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누리던 존경과 사랑이라는 것이 절대로 나 자신의 인간적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결국 나라는 인간은 나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과 존경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그분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그 존경과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적지 않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한 손님을 싣고 가는 당나귀가 마치 자신이 엄청나게 귀한 존재인 것으로 착각을 하면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사제직이라는 것은 우리가 능력이 좋아서 따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의 초대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선물로 공짜로 받은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겸손하게 처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독자분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선교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으실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달리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본당에서 정화조를 새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랄까요? 저는 외적으로 특별히 뭔가 이루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내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성경 강의를 하고 여러가지 기회를 통해서 영적인 성전을 지어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지금까지 해 오신 저 활동들 가운데 가장 기뻤던 일과 보람을 느낀 일이 있다면요? (일화 소개와 함께 당시 가졌던 생각들을 나눠주세요.)
기뻤던 일은 당연히 사람들이 내적으로 변화되어 갈 때입니다. 술을 죽자고 마시던 한 가정의 아버지가 제가 하는 강론을 듣고 슬슬 정신을 차리고 가족에게 돌아갈 때, 다른 이성의 유혹에 시달리던 한 가정의 어머니가 제 강론을 듣고 뉘우치고 성사를 볼 때, 제 본당의 청소년들이 나쁜 길에 들어서 있다가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돌아올 때에 그러한 소소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체험들이 저의 일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곤 하지요. 지금 있는 본당에서 사목한 지가 이제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최근 들어서 아주 미약하지만 조금씩 그 결과물이 보이고 있습니다.
굳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꼽자면, 한번은 한 가난한 할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서 다리에 커다란 구멍 두 개가 있었는데 자식이 있어도 제대로 찾아오지도 않아서 상처가 썩어 들어가려고 하는 걸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고 제가 꾸준히 찾아가 소독하고 붕대로 싸매고 해서 결국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주일 미사에 오시면 꼭 저와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나누셔야 속이 풀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건 기쁘고 보람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가슴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전 본당에서 한번은 시골에 다녀오다가 한 지체장애 아이가 길가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길래 데려다가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말을 어눌하게 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아이의 말대로라면 엄마가 자신을 칼로 찌르고 그 시골길에 죽으라고 내다버린 것이었습니다. 먼저 작은 병원에 갔는데 지켜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아파죽겠다는 아이를 치료하지는 않고 경찰을 불러다가 취조를 하고는 결국 그 병원에서는 상처가 깊어서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병원 측에서도 경찰 측에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서 보다 답답해진 제가 제 트럭으로 다시 큰 병원의 응급실로 아이를 데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그 아이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 또 하느님의 현존을 절실히 느꼈던 일화가 있다면요?
하느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우리 구미에 맞는 모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작은 새의 노래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린 아이의 맑고 순수한 얼굴에서 하느님의 순수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섭리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특별한 일화를 제시하더라도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겠지요. 하느님이 당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늘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찾는가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원하는 일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겠지요.
한번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한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여자아이가 있는데 학교에서 주술과 같은 장난(우리나라로 치면 분신사바)을 하고는 그 뒤로부터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쾌활하던 성격이 완전히 괴팍하게 변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도 데려가 보았지만 의사들로서는 딱히 검출되는 것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지요.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밤새 괴팍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다가 저에게까지 요청이 들어온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가기로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는 아주 못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제가 한 것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축복 예식서를 꺼내 들고 기도를 하고 성수를 축복해서 집안 구석 구석에 뿌렸지요.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가서 주님의 기도를 하려는데 아이가 집밖으로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밖으로 나가 아이에게 다가서니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더군요. 소파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성호를 긋고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잠잠해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그날 밤에 아이가 괜찮은가 연락을 해 보니 그 뒤로는 이상 없이 아주 잘 잔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감각 기관으로 감지될 수 없는 영적인 존재들이 분명히 있고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우리의 내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감지되는 분이 아니시지요. 그렇기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설령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는 ‘우연히 그렇게 된 일인걸 뭐’라고 하면 더는 할 말이 없는 셈이지요.
또 한 번은 여권 갱신을 하러 라파스에 혼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값을 싸게 부르는 택시를 탔는데 나를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더니 보조석에 1명, 내 좌우로 2명 해서 총 4인조 택시강도를 당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털렸지요. 하지만 현지인들의 말이 보통의 그런 경우에 그렇게 모조리 빼앗고는 자신들의 정보가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산골짜기에 죽여 내다버리는 것이 통상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저는 목숨을 보존했지요. 사제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체험을 절실히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목숨만 보존하면 무엇이든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영원한 생명만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얼마든지 평화 중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Q. 선교 활동을 하시면서 현재 가장 고민하고 계신 문제는 무엇인가요?
지금 가장 크게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제가 받은 은총을 다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나아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남는 시간이면 책상에 앉아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거나 말씀을 묵상합니다. 제가 하는 SNS활동도 그 고민의 결과물이지요. 선교 생활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묵상한 것을 SNS로 나누곤 했습니다. 현지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때면 제가 가르치려는 내용을 그들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끔 늘상 비유를 쓰곤 합니다.
구체적인 삶에서의 현재의 고민을 꼽자면 일치를 좀먹는 이들이 있어서 골치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하지 못해서 타인들도 불행하게 만들려는 무리들이지요. 의외로 적지 않은 숫자가 있습니다. 언뜻 자신을 훌륭한 봉사자의 모습으로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거룩함’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잇속이나 채우려는 부류들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이들에게도 새로운 날을 선물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그들을 분별은 하지만 심판할 수는 없지요. 기회가 닿는 대로 가르치고 가르치고 다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말이지요.
Q. 선교지에서 가장 힘이 되어주는 것은요?
물론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좋은 친구들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이 아니라 서로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어주는 이들이지요. 선교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좋은 친구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마음이 선하고 고마운 이들이지요. 참된 친구는 좋을 때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가 힘든 순간에 다가온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댕기열에 급성 간염이 걸려서 며칠 동안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본당에서 회식과 같은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쏜살같이 달려오던 이들은 정작 아무 반응도 없고,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이들이 다가와서 저를 보살펴 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묵상한 시간이었지요.
Q. 특별히 지향을 두고 기도하고 계신 것이 있나요?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하느님에게 의탁합니다. 제 방에는 늘 성모님 액자와 예수님 십자고상이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그분들이 보이지요. 저에게는 기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늘 기억하는 것이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Q. 한국이 가장 그리울 때는 언제인가요?
인터넷 속도가 느릴 때 정도일까요? 특별히 한국을 그리워해본 적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뿐이니까요. 특히나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원하는 소식을 바로바로 들을 수 있어서 크게 아쉬운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한국을 떠올리면서 안타까워 한 적은 많습니다. 시간이 멀다하고 터지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에 갈대처럼 휘둘리면서 정작 이미 지니고 있는 좋은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볼 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혹자는 음식 때문에 한국이 그립지 않느냐고 하는데 솔직히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날 때는 있어도 어느 한국 음식이 너무나 먹고 싶어서 한국을 그리워한 적은 없습니다.
Q. 하느님께서는 왜 신부님을 볼리비아에 파견하셨을까요?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분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볼리비아에서 배울 것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볼리비아에 있으면서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사제로서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외적으로 편안한 환경에 비하면 참으로 미천한 환경에 처해 있지만 사제가 진정으로 행복한 때는 안락한 환경에 처한 때가 아니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이루어나갈 때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도 한국의 평균 수준에 비하면 참으로 없이 살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외적 재화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휴가를 나갔을 때에 빵이 먹고 싶어서 어느 편의점에 들렀는데 너무나 수많은 종류의 빵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고른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은 오히려 인간을 지극히 감각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Q. 볼리비아는 신부님께 어떤 나라인가요? (어떤 나라로 기억될까요?)
볼리비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 있는 나라’입니다. 한국에 휴가를 나갔을 때에 만난 사람들은 볼리비아의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과 고생스러운 에피소드와 같은 것에 대해서 잔뜩 듣고 싶어했지만 저는 제가 느끼는 기쁨과 보람과 같은 것을 소개했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의 기쁨과 행복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니 실망하는 표정을 보이더군요. 가난한 곳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실컷 들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돈이나 몇 푼 줘서 돌려 보내려고 했는데 정작 물질적 도움은 바라지도 않고 오히려 기쁘고 행복하고 재밌게 산다고 하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같았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의 일은 하느님만이 아시겠지요. 어디를 가든 사제로서 제가 할 일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고 가톨릭 사제로서 그 도움을 줄 기회는 어느 곳에 가든지 있을테니까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순간까지 당신의 사명을 하다가 그분이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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