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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는 이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고 2,3-4)

페이스북에 가끔씩 올라오는 가난한 이들의 사진을 보면 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실제 삶에서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마주하고 구체적으로 돕고 살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생각으로는 마더 데레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을 읽거나 다른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상상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치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에서 군생활을 간접 체험하는 연예인들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들이 텔레비전 안에서 마치 군생활의 힘겨움을 체험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기서 머물러야 하는 이들의 마음이지요. 연예인들은 아무리 힘든 훈련이라 할지라도 머지않아 끝난다는 희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자신들이 체험한 것들이 아주 이쁘게 포장되어서 방영되리라는 것도 알고 그런 프로그램이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보장한다는 것도 알지요. 그러나 실제 군인들은 그러한 희망 없이 막연히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를 생각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기억하자고 페이스북의 자료를 공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알고 있을까요? 과연 누가 가난한 사람일까요?

가난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아이’만’이 아닙니다. 가난이라는 것은 물질적 가난도 있지만 정신적 가난, 영적 가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 늘 넘쳐납니다. 바로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아이가, 내 부모가 바로 그 가난한 이들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페이스북에 엉뚱한 게시물을 올릴 시간에 보다 구체적인 일에 헌신할 수 있다면, 즉 실제 내 주변의 여러 종류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용기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가장 쉬운 수단, 내가 내 의지를 움직여가며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찾는 것이지요. 그리고 애꿏은 아프리카 아이, 인도 아이, 남미 아이들이 그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좋아요를 클릭한다고 그 아이들이 갑자기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타인을 살리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이미 우리가 도울 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도움의 자리를 외면한 채로 우리의 명성을 위한 헛된 자선의 모습에 집착한다면 결국 우리는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차별하는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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