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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명의 주의사항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루카 9,3-5)

열두 제자에게 맡겨진 첫 복음선포 사명에서 주의할 사항입니다.

1) 의지처 - 하느님만 의지하기
오늘날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에 필요했던 도구이지요. 길을 떠나는 데에 의지할 도구이고 행여 들짐승을 만나면 자신을 방어할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말아야 할 것’처럼 과격하게 해석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느님만 의지하기’라는 것입니다. 이를 첫번 사명때에 예수님은 보다 엄밀하게 당신 제자들에게 강조하셨고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2) 정주 - 사명을 완수하기
일단 들어간 곳에 사명을 마칠 때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말아야 하지요. 돌아다닌다는 것은 제 잇속에 맞는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자신이 파견 받은 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일단 파견을 받아 한 곳에 같으면 그 곳에서 사명을 다할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경고 - 올바른 것을 실천하기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일 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만 반대로 세상의 적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없이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과 치고 박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마을 떠나고 그들의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의 표시를 드러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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