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혼배 교육

오늘은 지구 사제 회의가 있었습니다. 회의 주제는 ‘혼배 교육’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이해가 조금 필요합니다. 볼리비아에서 사람들은 성사생활을 올바로 이행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세례 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유아 세례만 받고 끝나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의미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도 많은 관공서에서는 한 사람이 주민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을 시에 세례 증명서를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이유 하나로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후속 교육이 전혀 없는 셈이지요. 그러다가 성체성사를 대변하는 첫영성체와 견진성사, 그리고 혼배성사라는 3가지 주된 성사를 받으면 자신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나마 구원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 세가지 성사를 놓치지 않고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배성사는 남미에서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준비해서 받을 수 있는 성사인 셈이지요. 그래서 교회 차원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헌데 여기 사람들, 아니 제가 사는 본당 사람들은 이 성사를 한가로이 준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물론 빈부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시내 본당 사람들은 부유한 환경을 바탕으로 주말에 시간을 내어서 꾸준히 혼배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지만 제가 일하는 본당 사람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시내 본당들이 몇 주, 혹은 몇 달에 거쳐서 혼배를 준비시키고 가르치는 동안 제가 머무는 본당에서는 4일이라는 지극히 짧은 교육을 수료하고도 혼배를 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지요.

헌데 오늘 회의에서 ‘혼배 교육을 너무 짧게 주어서는 안된다. 교구 규정에 이렇게 저렇게 나오고...’라고 하면서 한 신부님이 발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손을 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런 교육의 기회가 바다에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떤 그물을 쓰는가, 그리고 어떤 시기에 고기를 잡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멍이 잔뜩 뚫린 그물을 오랫동안 쳐 둔다고 해서 고기가 많이 잡힐 리는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잘 정비된 그물을 제때에 던져서 고기를 잡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배 교육을 함에 있어서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해주는 혼배 교육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이 그 교육을 듣고 과연 하느님에게로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지겨운 시간만 지나고 나면 해방감을 맛보고 다시는 교회에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의 그물은 잘 정비된 것일까요?

그리고 무조건 교육 시간을 늘리자는 것은 일단 장시간 그물을 쳐두면 뭐라도 걸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지요. 첫영성체 교육과 견진 교육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지만 성과가 있습니까? 교육 시간을 단순히 늘린다고 사람들이 더 교회에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뚜렷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물을 더 자주 던져야 합니다. 물론 자주 던지는 만큼 실패할 확률도 늘겠지만 성공할 확률도 늘 것입니다. 실패가 두렵다고 그물을 던지지 않으면 절대로 잃는 것은 없겠지만 동시에 얻는 것도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자꾸 제도를 정비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복음의 열정으로 일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잠시 회의가 이어진 뒤에 다시 발언 기회를 잡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꾸 회의 주제가 ‘정해진 교육 기간 규정의 준수’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는 저 자신이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걸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그 규정을 지키라고 한다면 아마 결혼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얼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귀나 당나귀가 호수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지요. 저는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머무는 본당의 사람들을 열심히 도울 생각입니다. 물론 사제 양심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살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살리겠습니다.”

모쪼록 모든 사제들이 두려움 없이 뜨거운 가슴으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