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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다무는 훈련

우리는 말하기를 어찌나 즐기는지요. 그러나 하루에 내뱉는 말을 점검해 본다면 그 가운데 얼마나 유익한 말들이 있을까요? 우리는 때로 뉴스 중개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법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연예 기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모든 말들을 반복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어떤 회사에서 매일같이 1000개의 상품이 나오는데 거의 모두가 불량품이라면 그 회사는 존재가치가 없는 회사입니다. 반대로 어떤 회사에서 매일 10개의 한정된 제품이 나오는데 그 제품이 정말 훌륭한 것이라면 그 회사는 갈수록 가치를 더해갈 것입니다.

우리가 쏟아놓는 말들은 우리의 생각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가 우리의 말들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셈이지요. 과연 우리가 만들어내는 ‘제품’들은 과연 훌륭한 것들일까요? 나와 너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도움을 주는 것들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불화를 조장하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들고, 자신의 우월함을 내비춰서 다른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추악한 말들일까요?

사람들은 입을 여는 법을 배웠지만 입을 닫는 법을 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 순간을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어하면서도 정말 필요한 말을 할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대화의 자리가 충만함으로 가득하기보다 ‘공허함’으로 가득한 이유, 고급 커피숍이 아니면 대화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유, 대화를 하기 위해서 시사 연예 정보에 익숙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모두 같은 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입을 다물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말을 절제하면, 그때부터 하느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거기에서 지혜를 배우게 되지요. 그 어떤 이라도 일단 말수가 적으면 ‘지혜로워’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할 말이 없어서 막연히 입을 다무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반드시 말을 해야 하는 때에 침묵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겁쟁이들이지요.

때가 되면 말을 하고, 불필요한 때에는 입을 닫는 훈련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순간 무언가를 지껄이고 있다가는 결국 마음이 텅텅 비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에 하느님은 머무르시지 않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엉뚱한 주인이 도사리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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