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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내면에서

악이라는 것을 착각하면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악은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주체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셨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 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왜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고 하느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런 예수님의 행위의 진실성이나 하느님의 뜻과 부합하는지 전혀 상관없이 다만 자신들의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그에 반대하곤 했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금육이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교회법으로는 교회에서 정한 재계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교회가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행위를 충실히 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지키는지 알고 지키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금육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것들,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도달하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절제의 훈련이고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 육적인 즐거움을 참는 것이며, 나아가 그렇게 절약한 것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쓰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헌데 이런 내면적인 가치는 온데간데 없이 금요일만 되면 병적으로 ‘고기만 안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고기는 먹고 싶은데 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니 사제에게 와서 묻는다는 것이, ‘어떤 고기는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닭은 안되고 계란은 되느냐는 둥, 그럼 회를 사먹으면 되겠다는 둥, 결국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들의 욕구가 가로막히니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채우려고 안달하는 모습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행위의 규정을 지키겠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하느님에게서 엇나가 있는 셈입니다.

행여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일년에 한 번 뿐인 시어머니의 생신입니다. 헌데 안타깝게도 금요일에 생신이 걸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셔서 사물 구분이 안되십니다. 헌데 고기를 좋아하시고 생일난 모인 자식들이 자기와 더불어 맛나게 한끼 식사를 하는 걸 좋아하십니다. 헌데 며느리가 가톨릭 신자라고 고기를 하나도 마련하지 않고 법을 지키겠다고 나섭니다. 과연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아니면 식구들이 모르는 척 모여서 어머니와 함께 고기가 든 반찬을 즐겁고 맛있게 먹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마 이 비유를 듣고 ‘정말 그래도 되나?’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법과 규정에 사로잡혀 있는 셈입니다. 나아가 더욱 추하고 못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든 저든 핑계를 만들어서 고기 먹을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결국 다들 자신들이 원하는 길로 가는 셈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길로 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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