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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이스라엘편

종살이의 고통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온갖 고된 노역과 일상적인 천시와 무시에 시달렸으며 자유를 빼앗기고 이집트인들에게 굴종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셨지요.

정화의 고통
이집트에서 죽을 뻔 하던 이들을 살리겠다고 광야로 데리고 왔습니다. 광야는 쉽지 않은 곳입니다. ‘시련’의 장소이고 ‘정화’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그 시련과 정화는 그들 안에 깃들어있던 때를 벗겨내어 온전히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에 필요한 것이었고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 앞에 당장 다가오는 고통이 마냥 불편하고 싫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옛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지요. 자신들이 메여 있던 종살이의 불편함은 싹 다 잊어버리고 그 옛날의 쾌락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의 고통
하느님은 이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불뱀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게 되고 하느님의 진노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즉시 그들은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하느님의 종에게 그분의 진노를 가라앉혀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고통의 의미, 즉 하느님에게서 돌아선 이들이 느끼게 되는 고통의 의미를 맛 보게 된 것입니다.

고통을 이기는 수단
그 뒤로 이스라엘 백성은 구리로 된 불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뱀을 쳐다보는 이들은 최악의 고통인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불뱀은 지나온 모든 고통들을 상기하는 상징이자 구원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우리자신 편

종살이의 고통
우리는 하느님을 모를 적에 세상 안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왔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살아왔지요.

정화의 고통
그러한 중에 하느님을 만나 ‘신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먼젓번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다시 다가오는 고통, 즉 우리를 살리고 정화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불평 투성이입니다. 차라리 신앙을 알지 않았더라면 옛 삶의 쾌락을 마음껏 누릴 것이라고 투덜대기 시작하지요.

하느님의 진노의 고통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여러가지 예시를 보여 주십니다. 먼젓번 고통에서 구원 받은 체험을 잊은 자들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서 보여 주시지요. 이에 우리는 다시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나 자신의 불치병 선고와 같은 모든 사건은 우리의 불평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예시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고통을 이기는 수단
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다시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깃든 어두운 마음, 하느님을 저버리려는 마음을 다시 돌이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일은, 아직 잠들어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우리가 겪은 이 해방의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복음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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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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