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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과 머무는 날, 신랑을 빼앗기는 날

우리 인생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단계가 있지요. 처음부터 직장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순진한 어린아이로 시작하지요. 그리고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성장해 가면서 책임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대학 수업을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말마디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조금씩 영역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헌데 사람의 성장은 단순히 육적으로만, 정신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영적인 면에서도 같은 성장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영적 성장은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성장은 여러가지 시련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맑고 깨끗한 상태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시련을 거치지 않은 상태의 맑음이지요. 순수함, 순진함이라고 표현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절로 세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조금씩 물들어가게 되지요. 그것 자체가 일종의 시련이 됩니다. 하지만 그 단계는 보통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에 물든 상태에서 보통은 ‘가르침’을 접하지요. 바로 신랑을 만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가르침을 즐깁니다. 바로 신랑과 함께 기뻐하는 단계이지요. 그리고나서 두번째 시련이 다가오는데 바로 ‘정화’의 과정입니다. 이미 물들어있는 상태에서 다시 원래의 깨끗함을 회복하고자 시도하는 단계이지요. 이 단계가 바로 ‘신랑을 빼앗기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기뻐하다가 삶의 정화가 시작이 되면 사람은 단순히 신앙이라는 것이 기쁨에 가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우리도 단식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루카 5,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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