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낙관론자가 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모든 게 좋아진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표현하지 마십시오. 일꾼이 없는데 추수가 어떻게 됩니까? 그 말을 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일을 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비로소 그 비슷한 말을 할 자격이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좋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회복되고 밝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런 회복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모든 것이 나아진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일하는 이는 더욱 더 겸손해져서 하느님의 존엄하신 뜻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이 늘 부족하다고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루에 다가오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헤쳐 나가지만 늘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는 자신이 늘 부족하다는 것을 더욱 더 인지하게 됩니다. 그러니 함부로 모든 것이 다 좋아진다고 하지 못합니다. 늘 부족하고 모자랄 뿐이지요. 그의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쉬지만 그가 바라보는 주변은 오히려 늘 더욱 안타깝고 늘 더욱 모자라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마음을 놓고 쉬겠지만, 새로운 아침이 다가오면 늘 다시 일할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은 우리의 무책임함의 결과입니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