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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다고 믿느냐?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50)

예수님은 직접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거기에 있는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놀라곤 했지요. 당나귀를 가져오라 할 때에도 그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먼저 알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런 일들은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거룩한 이들의 기이한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성인전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요상한 능력에만 관심을 갖기가 일쑤이고 그런 능력을 지니고 싶어하지요. 그런 능력들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런 능력들이 있기 전까지는 어떤 수난과 시험의 과정을 거쳤을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셈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신기한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신기한 일을 보게 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하고 반대로 일상적인 일들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곤 합니다. 병이 치유가 되던지, 내가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지던지 하는 식의 일을 기다리고 바라면서 하느님이 내 이성의 의심의 선을 넘어서는 것을 보게 도와주면 그제서야 하느님을 믿겠다고 일종의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냐구요? 바로 그들의 죽음의 때입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죽고 나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땅에 내려놓고 나면 과연 그때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현세의 수많은 것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탐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셈이지요.

우리의 정신은 흐리멍덩해져 있고, 볼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찾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표지’와 ‘상징’들로서 우리를 초대하고 이끌어 줄 뿐이지요. 우리는 볼 수 없는 우리 내면의 능력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기적을 아무리 보아도 끝까지 의심하려는 사람에게는 약이 없습니다. 반면 아주 소박한 일상의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사람은 훗날 딱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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