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루카 9,6)
치유는 하느님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참된 치유자이시지요. 치유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육신과 그 육신을 움직이는 정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영의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뭔가 잘못되어서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는 버릇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때로는 너무 심하게 물어 뜯어서 손가락에 상처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는 그때마다 그의 손가락을 치유해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의 정신이 올바르게 서지 않는 이상은 그의 육체적 상해는 계속 반복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사람의 ‘영’이 바르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정신과 육신을 혹사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영혼과 정신과 육신을 같이 돌보아야 하고 따라서 가장 온전한 치유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직분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육의 치유자가 존재하고 정신의 치유자가 존재하고 영의 치유자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의사는 육신의 병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여러가지 치유의 수단들이 존재합니다. 좋은 책과 한적한 여행과 지혜로운 이와의 만남과 같은 것은 정신을 휴식하게 하지요. 그리고 사제들은 영의 치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예수님의 시대에는 의학 기술 자체가 오늘날만큼 그리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과 정신의 치유와 더불어 육신의 병까지도 고쳐주었지요. 오늘날에도 사제들은 예식 중에 기름을 바르지만 그때에는 기름이 진정한 치유의 수단으로 쓰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육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의학적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지요. 즉 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준비된 의사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의사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살리려고 듭니다. 즉, 탐욕에 사로잡힌 의사들이 많지요. 돈이 없으면 병원 문턱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혼자 앓다가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돈만 밝히는 의사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직분을 맡아 이행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전혀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하는 셈입니다. 만일 고해성사를 그렇게 돈을 받고 했더라면 수많은 사제들은 이미 갑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릴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의사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지불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의 본질적인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라는 직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려야지요. 간단한 약품 처방전 하나만 받아 왔더라도 그 약을 먹고 나았을 사람들이 의사에게 갈 돈이 없어서 끙끙 앓다가 병을 잔뜩 키워서 결국 죽어나가는 일이 우리 동네에는 허다합니다. 나중에 병이 표면적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이미 손을 써도 늦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정작 필요한 것을 주지 않고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의사들은 자신의 본질적 사명(사람을 살리는 일)을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치유는 하느님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참된 치유자이시지요. 치유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육신과 그 육신을 움직이는 정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영의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뭔가 잘못되어서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는 버릇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때로는 너무 심하게 물어 뜯어서 손가락에 상처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는 그때마다 그의 손가락을 치유해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의 정신이 올바르게 서지 않는 이상은 그의 육체적 상해는 계속 반복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사람의 ‘영’이 바르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정신과 육신을 혹사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영혼과 정신과 육신을 같이 돌보아야 하고 따라서 가장 온전한 치유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직분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육의 치유자가 존재하고 정신의 치유자가 존재하고 영의 치유자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의사는 육신의 병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여러가지 치유의 수단들이 존재합니다. 좋은 책과 한적한 여행과 지혜로운 이와의 만남과 같은 것은 정신을 휴식하게 하지요. 그리고 사제들은 영의 치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예수님의 시대에는 의학 기술 자체가 오늘날만큼 그리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과 정신의 치유와 더불어 육신의 병까지도 고쳐주었지요. 오늘날에도 사제들은 예식 중에 기름을 바르지만 그때에는 기름이 진정한 치유의 수단으로 쓰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육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의학적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지요. 즉 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준비된 의사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의사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살리려고 듭니다. 즉, 탐욕에 사로잡힌 의사들이 많지요. 돈이 없으면 병원 문턱도 들어가보지 못하고 혼자 앓다가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돈만 밝히는 의사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직분을 맡아 이행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전혀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하는 셈입니다. 만일 고해성사를 그렇게 돈을 받고 했더라면 수많은 사제들은 이미 갑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릴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의사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지불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들의 본질적인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라는 직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려야지요. 간단한 약품 처방전 하나만 받아 왔더라도 그 약을 먹고 나았을 사람들이 의사에게 갈 돈이 없어서 끙끙 앓다가 병을 잔뜩 키워서 결국 죽어나가는 일이 우리 동네에는 허다합니다. 나중에 병이 표면적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이미 손을 써도 늦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정작 필요한 것을 주지 않고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의사들은 자신의 본질적 사명(사람을 살리는 일)을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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