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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화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콜로 1,21-22)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뒤바뀌었습니다. 전에 우리는 노예로 살아 왔었습니다. 우리의 노예 상태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노예로 살아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족쇄를 푸는 ‘열쇠’로 다가오셨습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세상에 사로잡혀 어찌할 줄 모르고 더욱 더 어둠에 빠져 들어가던 우리에게 빛이 되어 오신 그분의 열쇠로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가치를 뒤바꾸셨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미천하게 바라보던 것들, 가난하다고 배우지 못했다고 천시하던 이들이 그들 내면의 가치로 하늘 드높이 오르게 되었고, 반대로 전에 우리가 동경하던 것들, 부유하고 고지식하고 고상하고 외적으로 화려하던 것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었습니다.

아직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채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고상함’을 찾는 위선자 부류들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간섭받지 않는 조용한 신앙생활을 즐기고, 신부, 수녀님들과 어울려 값비싼 음식을 즐기는 것을 특권으로 삼고, 정작 자신은 그 어떤 봉사도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이의 주변에서 늘 빈정거리고 시기하고 비판하기만 하는 그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도 당신의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세상은 뒤바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도 그 모든 것을 마련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높여질 때, 세상은 그분을 바라볼 것이고 결국 제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길이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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