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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과 인기

연예인은 다른 말로 유명인, 또는 인기인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모두 ‘명예’, ‘인기’와 관련된 이들인 셈이지요. 사람들의 인기를 통해서 자신의 자리가 마련되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인기라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든 저든 관심만 끌 수 있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다가서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늘 조금 더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에 이끌려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모두 올바르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자극하고 귀를 자극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되는 법입니다. 그 안에 어떤 실속이 존재하는지, 어떠한 가치가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지요. 그래서 어느 연예인의 자선활동보다는 그 연예인의 누드사진 유출이 더 관심을 받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자선활동마저도 정말 순수한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에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합니다.

연예인들은 사람들의 여러가지 욕구 가운데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연예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돈벌이 수단’이 되는 셈이지요. 어느 모로 보나 그들에게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자기 혼자 스스로 마음을 모으지 않는 이상은 너무나 쉽게 주변의 그런 욕구들에 휘둘리게 마련인 셈이지요.

인기라는 것은 중독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맛들이기 시작하면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게 되지요. 커다란 극장에서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은 이는 작은 소극장에서 몇몇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는 것에는 별로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인기’라는 것이 물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지요. 더는 생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은 이런 저런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합니다.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이미지보다 더 나은 이미지가 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더 나은 것을 소비하려 들겠지요. 그래서 이전에 구축된 이미지들은 잊혀지고 폐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이 튼실하지 못한 연예인들은 자신의 이미지들의 소비가 적어지면, 즉 인기가 사라지면 점점 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이라는 수단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목매달아서 하는 일이 아닌 자신이 하는 일을 그 자체로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이지요.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나 자신인 것입니다.

댓글

정창훈님의 메시지…
좋은 글 감사합니다.특히 즐기는 일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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