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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의 비유(삶을 돌려드리기)

루가복음 19장 두번째 이야기 - 미나의 비유

복음서에는 돈으로 하는 비유들이 많이 나온다.
사람들의 초유의 관심사는 돈이기 때문이다.
돈이 아닌 다른 것들로 비유를 하면 추상적인 '시'가 되어 버리지만,
돈으로 비유를 하면 피부로 와 닿는 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도 이런 비유를 많이 썼다.

하지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과거의 화폐의 단위인 '미나'를 종들에게 맡기고 떠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연 하느님은 무엇을 맡기셨을까?
하느님은 무엇을 거두려 하실까?
그건 성과는 드러내는 무엇일까?
그래서 교회는 세례자 수에 집착하고, 교회의 크기에 열중하는 것일까?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 난 과감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어떤 특별한 성과를 이루는 무언가가 아니라,
'삶' 바로 그 자체이다.

그럼 이걸 어떻게 추수할 수 있을까?
어디다 투자를 해서 어떻게 거두어야 하느님께서 만족하실까?

삶을 투자하는 방법,
지금부터 잘 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전에는 내 삶을 내가 100%썼다.
아침에 겨우겨우 일어나서는 씻고 깨작깨작 밥먹고 일하러 나가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 상사 눈치 봐가며 적당히 일하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잤다.

여기에서 90%만 자기를 위해 쓰고 10%를 하느님에게 드리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호를 긋고 나머지는 똑같이 지낸다.

나 80% 하느님 20%
성호를 긋고, 더 이상 대충 때우는 아침이 아니라 하루를 주님의 뜻대로 활달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다. 나머지는 내 방식대로.

나 50% 하느님 50%
성호, 충분한 영양섭취, 전에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던 직업이 이제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맡은 책임을 성실히 이루기 위해 다니게 된다. 나머지는 내 방식대로.

나10% 하느님 90%
돌아와서도 텔레비전을 보기 전에 저녁기도를 바침.

이런 식이다.
자신이 받은 삶이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100%를 온전히 돌려 드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
그렇게 노력한 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적게나마 50%이든 20%이든 노력한 사람은 그만한 상급을 받는다.

하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써버린 사람은,
훗날 빈손이게 된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사람은,
이웃을 진정 사랑하게 되고,
그들이 기뻐하면 자신도 기뻐하게 된다.
결국, 하느님께 삶을 80%, 100% 드린 사람은,
타인의 삶의 기쁨을 더불어 얻게 된다.
이런 바탕으로 복음의 이상한 문장도 이해가 된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우리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는 일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에겐 청소부나 고층 빌딩의 대기업 상무나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하느님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는 오늘의 삶을 얼마나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있는가?
매 순간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
오직 그 한 가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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