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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단상

우리는 타인의 가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게을러서 그런 것이고, 그들의 문화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우월감을 자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의 대부분의 소유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할 몫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달에 같은 시간을 일하면서 누구는 수백만원을 벌고, 누구는 십수만원을 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갖추고 누린 것은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난한 지역의 선교사가 가면 사람들은 ‘가난’에 대해서 그토록 듣고 싶어합니다. 그들의 궁핍함에 대해서 듣고 싶어하고, ‘고생스러움’에 대해서 듣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궁핍하고 고생스러움을 들어야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정상이 아닙니다. 이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비교문화’입니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비교하고, 내 남편과 남의 남편을 비교하는 일종의 병적 문화입니다. 그래서 선교사의 궁핍한 체험을 듣고는 지금의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문화적 우월감을 누리고 싶은 거지요. 그러한 선교사의 체험이 역으로 자신에게 만족스러움을 체험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선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지 거지 동냥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사랑하기에 그가 필요한 것을 도와야 하는 것이지,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하듯 그가 불쌍해서 내가 다 먹고 남는 것 중에서 떼어 던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사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일하는 곳의 친구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나아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지요. 그리고 제가 바라보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국이 얼마나 부유하고 그 부가 사람들의 심성을 파고들어 영적 삶을 갉아먹고 있는지를 말하지요. 들을 사람은 듣고 듣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귀를 막습니다.

저도 압니다. 우는 소리를 해야지 2차 헌금이라도 조금 더 나온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저는 그쪽 면으로는 굉장히 미숙한 선교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교사처럼 강론하고 활동하지 않는 자격미달 선교사이지요. 돈을 더 왕창 받아가서 가서 멋들어진 공소 건물도 짓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말입니다. 벌써 경력이 7년인데 지은 거라고는 땅 속에 묻어놓은 ‘정화조’ 뿐이니 도대체 한 일이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그리고 선교라는 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이 본질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공소가 아니라 빌딩이라도 지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지혜는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음으로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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