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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변화

저는 볼리비아에 사는 한국인입니다. 하지만 볼리비아에 있는 본당 식구들이 제 식구들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어딜 가든지 그 얼굴이 떠오르고 어디서 무얼 할까 궁금해지며 반대로 그들도 내 소식이 궁금합니다. 그 어떤 이해관계도 없으면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지요.

우리가 훗날 들어가게 될 하늘나라는 ‘인종, 국가, 연령, 성별, 신분, 교육’ 등등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곳입니다. 모든 이는 자신의 역량 안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고 사는 거지요. 그리고 보상은 ‘돈’이 아니라 도움 받은 이들의 행복이 됩니다. 그들의 행복과 기쁨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되는 곳이지요.

우리는 볼리비아 민족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수난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고 어딘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내 안테나 범위가 작동하는 수준에서 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저마다의 안테나가 닿는 곳까지 걱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변화시킬 수 있는 범주라는 것은 ‘온세상’이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에게 맡겨 두면 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 수 있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굶는다고 우리도 굶어야 한다는 건 억지입니다. 우리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그 아이들을 도울 기회를 찾는 것이 합당합니다. 내가 도울 힘이 없으면 남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볼리비아 사람들은 지금 내가 하는 활동을 하나도 못할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죄책에 시달린다면 저는 오로지 방에 앉아서 물이 아까워 제대로 씻지도 않으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무언가를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깨끗이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원기를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진리와 선과 사랑은 우리의 생활 범주 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건강한 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아이들은 학원 교육에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이 만들어 놓고 나는 국가의 교육 정책이 엉망이라고 나선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정책부터 살펴야 그 아이들이 훗날 자라서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부터 ‘많은 점수가 교육의 목표다!’라고 세뇌를 시키고는 그 아이들이 자라나면 ‘교육은 생활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가르치는 훌륭한 사회인이 되라고 하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요.

제 집 앞마당을 청소해야 그 구체적인 모범을 보고 다른 이웃도 자연스럽게 배우고 결국 동네가 깨끗해지는 법입니다. 어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나와서 ‘동네를 청소하자!’라는 슬로건을 걸고 억지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청소를 시킬 수는 있지만 결국 그런 ‘운동’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동네는 금세 더러워지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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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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