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예레 17,5)
무너질 것을 알면서 벽에 기대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벽이 튼튼하다고 믿고 벽에 기대고 섭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등을 대었다가 벽과 함께 무너지는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벽이 ‘튼튼한 척’을 하고 있어서 우리가 속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충분히 살펴보면 벽의 상태를 알고 있는데 ‘부주의해서’ 그것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벼움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선조들이 살아갔고, 어쩌면 우리가 한 오류들을 수도 없이 반복했는지도 모릅니다. 헌데 우리는 ‘인간’과 그 ‘업적’을 믿으니 어찌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인간이 피라미드를 쌓고 수십층의 빌딩을 올리는 걸 두고 감탄을 하고 있으니 어찌나 어리석은 인간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80-90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수명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아웅다웅 하는 모습은 영원을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셨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보고 깨달아 허무에서 벗어나 영원한 기쁨을 간직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짧은 시선 안에서 하느님의 그러한 작업은 ‘멍청함’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는 ‘선교’를 위해서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려는 것은 세상 안에서의 어떤 나은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교를 통해, 복음화를 통해 그에게 ‘영원’을 선물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매번 우리의 그런 노력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멍청함’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제에게는 외적으로 더 나은 본당이 필요하고 더 많은 신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선교를 하려는 사제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많은 본당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욕구에 사로잡혀 사는 사제에게 그런 본당은 ‘저질 본당’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본당을 찾는 사제는 순진하고 ‘멍청한’ 사제일 뿐입니다. 어떻게든 윗 어른들에게 줄을 잘 서서 더 나은 본당을 가는 것이 똑똑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인간적인 의지처를 마련하려는 자들이 훗날 반드시 당하게 될 일이 있습니다.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가 물고 있는 사탕을 빼앗아 보면 됩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의 게임기를 빼앗아 보면 됩니다. 어린 아이는 밥을 먹어야 하고, 아이는 게임을 내려놓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 살아가는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한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고 울게 될 자들이 무척이나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반면 하느님을 의지한 이들, 그들은 무엇이 진정한 열매를 맺게 하는지를 배워 알게된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뿌리박은 원천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상의 아주 세세한 순간까지도 맺는 열매가 엄청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예레 17,9)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치유되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이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접할 때에 때로는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는 그 마음을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 17,10)
하느님은 그 마음을 알고 계시며 이리 저리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도록 수도 없이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의 행실의 결과에 따라 준비한 것을 받을 뿐입니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 벽에 기대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벽이 튼튼하다고 믿고 벽에 기대고 섭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등을 대었다가 벽과 함께 무너지는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벽이 ‘튼튼한 척’을 하고 있어서 우리가 속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충분히 살펴보면 벽의 상태를 알고 있는데 ‘부주의해서’ 그것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벼움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선조들이 살아갔고, 어쩌면 우리가 한 오류들을 수도 없이 반복했는지도 모릅니다. 헌데 우리는 ‘인간’과 그 ‘업적’을 믿으니 어찌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인간이 피라미드를 쌓고 수십층의 빌딩을 올리는 걸 두고 감탄을 하고 있으니 어찌나 어리석은 인간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80-90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수명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아웅다웅 하는 모습은 영원을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셨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보고 깨달아 허무에서 벗어나 영원한 기쁨을 간직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짧은 시선 안에서 하느님의 그러한 작업은 ‘멍청함’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는 ‘선교’를 위해서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려는 것은 세상 안에서의 어떤 나은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교를 통해, 복음화를 통해 그에게 ‘영원’을 선물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매번 우리의 그런 노력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멍청함’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제에게는 외적으로 더 나은 본당이 필요하고 더 많은 신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선교를 하려는 사제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많은 본당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욕구에 사로잡혀 사는 사제에게 그런 본당은 ‘저질 본당’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본당을 찾는 사제는 순진하고 ‘멍청한’ 사제일 뿐입니다. 어떻게든 윗 어른들에게 줄을 잘 서서 더 나은 본당을 가는 것이 똑똑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인간적인 의지처를 마련하려는 자들이 훗날 반드시 당하게 될 일이 있습니다.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가 물고 있는 사탕을 빼앗아 보면 됩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의 게임기를 빼앗아 보면 됩니다. 어린 아이는 밥을 먹어야 하고, 아이는 게임을 내려놓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 살아가는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한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고 울게 될 자들이 무척이나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반면 하느님을 의지한 이들, 그들은 무엇이 진정한 열매를 맺게 하는지를 배워 알게된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뿌리박은 원천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상의 아주 세세한 순간까지도 맺는 열매가 엄청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예레 17,9)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치유되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이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접할 때에 때로는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는 그 마음을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 17,10)
하느님은 그 마음을 알고 계시며 이리 저리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도록 수도 없이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의 행실의 결과에 따라 준비한 것을 받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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