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필요한 학문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대응해서 올바른 길로 이성을 인도할 때에 참으로 필요한 학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학은 ‘지식’ 안에만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 신학은 죽은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런 죽은 요소들은 악마의 무리도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외친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신앙고백’을 지껄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실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어둠의 영들은 적어도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두려움’이라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아예 ‘인식’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합니다. 아침 방송에 어느 음식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들으면서 ‘참된 지식’에 관한 내용은 공연히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신학자들의 탓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겸손에 대해서 3시간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겸손하지 못한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순명에 대해서 논문을 쓰지만 순명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요. 신학은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움직이는 무언가로 점점 더 멀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렇게 정돈된 학문은 책 속에 갇혀 더는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지요.
신학은 필요한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자면 신학은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반드시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한 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오류도 있습니다. ‘실천’을 일종의 사조, 주의로 해석해서 자신과 반대대는 경향에 대놓고 맞서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실천이라는 것은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도 실천해야 하고 겸손도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이도 훌륭한 실천가일 수 있습니다.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외친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신앙고백’을 지껄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실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어둠의 영들은 적어도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두려움’이라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아예 ‘인식’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합니다. 아침 방송에 어느 음식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들으면서 ‘참된 지식’에 관한 내용은 공연히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신학자들의 탓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겸손에 대해서 3시간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겸손하지 못한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순명에 대해서 논문을 쓰지만 순명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요. 신학은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움직이는 무언가로 점점 더 멀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렇게 정돈된 학문은 책 속에 갇혀 더는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지요.
신학은 필요한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자면 신학은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반드시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한 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오류도 있습니다. ‘실천’을 일종의 사조, 주의로 해석해서 자신과 반대대는 경향에 대놓고 맞서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실천이라는 것은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도 실천해야 하고 겸손도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이도 훌륭한 실천가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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