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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먼저 가신 길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요한 13,36)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 걸까요? 그리고 왜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는 되는 걸까요? 단순한 장소의 이동 시간 때문인 걸까요? 어떻게 하면 따라갈 수 있는 걸까요?

성경 안에 표현된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지상의 ‘분석’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예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천상 사정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어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건너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어딘가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지닌 공간과 시간의 관념마저도 뛰어넘는 곳이라는 것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작은 종이컵으로 바닷물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거기에 지금은 우리가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 새로운 곳에 머무를 자격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반대로 이 땅에 묶인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아무리 우리가 천상을 그리며 산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간극동안 우리가 변화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향해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은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으시니까요.

베드로사도는 순박하고 성격이 급했으며 우직하고 충실했습니다. 그 내면에 장단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그를 주님의 으뜸 제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게 만들었지요.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지금은 나약하고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럽지만 그 안에 깊은 곳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지요. 때가 차면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도 때가 되면 그분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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