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덮씌우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투사’라고 표현하지요. 상대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느껴서 상대도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상대는 배가 고프지 않은데 내가 배가 고파서 그가 지금 전혀 다른 생각으로 슬픈 얼굴을 하는데 ‘배가 고파서 저런다’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의 속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지니도록 했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보다 깊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의 마음이 투명한 유리처럼 비추어 보인다면 우리는 당장에 상대의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함부로 더러운 생각이나 나쁜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천국은 그러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곳일테지요.
하지만 지상은 상황이 다릅니다. 서로의 마음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진지하게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우리는 ‘투사’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어둠을 살고 있으면 내 주변을 어둠으로 투사해 버립니다. 상대가 전혀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데 내가 이미 악한 생각에 가득 차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악하게 바라보기만 하지요. 남편에게 집착하는 아내, 또는 아내에게 집착하는 남편은 상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상상들이 오가고 그런 욕구들이 죽지 못해서 상대를 바라보면서도 절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런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것으로 하느님에게 투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하느님이 등장하고, 복수의 하느님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실제 하느님은 지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진정한 본질을 알고 계셨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그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습니다.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을 뿐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예수님에게 투사를 했고 그분에게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덮씌워 버렸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상대는 그 사람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원하는 그의 모습’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나의 기대감을 내려 놓고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진지한 관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람의 속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지니도록 했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보다 깊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의 마음이 투명한 유리처럼 비추어 보인다면 우리는 당장에 상대의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함부로 더러운 생각이나 나쁜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천국은 그러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곳일테지요.
하지만 지상은 상황이 다릅니다. 서로의 마음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진지하게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우리는 ‘투사’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어둠을 살고 있으면 내 주변을 어둠으로 투사해 버립니다. 상대가 전혀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데 내가 이미 악한 생각에 가득 차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악하게 바라보기만 하지요. 남편에게 집착하는 아내, 또는 아내에게 집착하는 남편은 상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상상들이 오가고 그런 욕구들이 죽지 못해서 상대를 바라보면서도 절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런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것으로 하느님에게 투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하느님이 등장하고, 복수의 하느님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실제 하느님은 지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진정한 본질을 알고 계셨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그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습니다.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을 뿐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예수님에게 투사를 했고 그분에게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덮씌워 버렸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상대는 그 사람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원하는 그의 모습’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나의 기대감을 내려 놓고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진지한 관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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