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 3,19)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는 요한 복음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요한 복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을 성찰하는 데에도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무엇이 빛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빛이 됩니다. 그분의 선과 진리, 정의, 순수함, 정결함… 모든 것이 빛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어둠’을 형성합니다.
‘돈’은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이런 상투적인 질문에 우리는 쉽사리 돈을 하느님의 반대편에 놓아 버리고서 ‘나쁜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돈은 ‘칼’과 같습니다. 그 자체로는 빛도 어두움도 아닙니다. 다만 그 쓰임새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마치 의사가 칼로 사람을 구하면 그 칼은 생명의 도구가 되고, 강도가 같은 칼로 사람을 죽이면 그 칼은 죽음의 도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악하게 또는 선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자유의지인 것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더 들면 다음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무조건 ‘선’인 것처럼 간주됩니다. 공부를 잘 하고 열심히 하고, 공부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공부를 강요하는 근본 목적에 하느님의 방향, 즉 진리와 선과 사랑이 들어있지 않는 이상 ‘공부’라는 것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간의 불화를 야기시키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숨통을 막는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지요.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의 반대편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죄’라는 걸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죄를 짓지 못하고, 강아지가 죄를 짓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 마음 근본 방향을 하느님에게서 반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하느님과 반대 방향으로 서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우겨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이 원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강조를 합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라는 것은 휴지조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며 그분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빛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빛이라고 우겨대지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불쌍한 장님들일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소경의 무리들일 뿐이지요.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는 요한 복음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요한 복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을 성찰하는 데에도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무엇이 빛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빛이 됩니다. 그분의 선과 진리, 정의, 순수함, 정결함… 모든 것이 빛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어둠’을 형성합니다.
‘돈’은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이런 상투적인 질문에 우리는 쉽사리 돈을 하느님의 반대편에 놓아 버리고서 ‘나쁜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돈은 ‘칼’과 같습니다. 그 자체로는 빛도 어두움도 아닙니다. 다만 그 쓰임새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마치 의사가 칼로 사람을 구하면 그 칼은 생명의 도구가 되고, 강도가 같은 칼로 사람을 죽이면 그 칼은 죽음의 도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악하게 또는 선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자유의지인 것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더 들면 다음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무조건 ‘선’인 것처럼 간주됩니다. 공부를 잘 하고 열심히 하고, 공부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공부를 강요하는 근본 목적에 하느님의 방향, 즉 진리와 선과 사랑이 들어있지 않는 이상 ‘공부’라는 것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간의 불화를 야기시키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숨통을 막는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지요.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의 반대편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죄’라는 걸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죄를 짓지 못하고, 강아지가 죄를 짓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 마음 근본 방향을 하느님에게서 반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하느님과 반대 방향으로 서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우겨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이 원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강조를 합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라는 것은 휴지조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며 그분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빛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빛이라고 우겨대지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불쌍한 장님들일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소경의 무리들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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