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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며…

아마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선교 사제는 휴가를 어떻게 보내고 또 떠나면서 어떤 감흥일지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적어 보렵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한국은 자연이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은 인심이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언어가 있고, 아름다운 문화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 사람인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이야말로 저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한국은 미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정신없이 바삐 살고, 지나치게 소비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짐은 이미 보이고 있지요. 자연은 망가지고, 마음도 망가지고, 말도 망가지고, 문화도 망가지는 조짐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자연보다는 회색 도시가 많이 들어섰고,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한 정보다는 매서운 바람이 느껴지며, 언어는 새로운 말들이 마구 뒤섞여 이해가 안되고, 소모적인 문화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이 외치고 다녔습니다. 저야 가톨릭 사제이니 당연히 하느님을 회복하자고 외치고 다녔지요. 왜냐면 저는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가운데 계시면 모든 것은 치유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하느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물론 모두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입도 뻥끗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기를 더 바랬으니까요. 그래서 듣기도 많이 했습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차분하게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이면에 내적인 가치를 잃어가는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배가 고파서 감사히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무얼 먹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들어간 편의점에서 저는 무슨 빵을 골라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모든 빵들은 화려한 포장지에 싸여져서 ‘나를 사줘요!’라고 외치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돌아가는 볼리비아에는 아직 제가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남은 임기를 꽉꽉 채우고 나면 또 홀가분하게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한국에도 할 일은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볼리비아에는 사제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문제이고, 한국은 사제가 많아도 사제가 부족한 형국이었습니다. 저는 어딜 가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세계 어딜 가더라도 사람들은 제가 간직한 희망을 찾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저는 한마리 작은 새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새였지요. 물론 새치고는 덩치가 좀 있고 외모는 무섭게 생겼지만, 저는 열심히 하느님을 노래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열심히 도왔습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많은 분들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몇몇 분들이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근데 그래봐야 고작 2년입니다. 지금껏 7년을 지내왔는데 2년은 너무나 금방 지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돌아오면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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