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마르 15,3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방법을 강구합니다. 가능하면 십자가에 올라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다른 이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이들의 몫이 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 자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에, 그 몫은 낮은 이들의 몫으로 떠넘겨집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저마다 십자가의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머무르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 됩니다. 사랑이 필요한 일이고 그것이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만일 부모가 이를 소홀히 하고 다만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편한 것만을 추구하면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에 굶주린 아이가 되고 맙니다. 결국 부모의 십자가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셈입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미루어 두는 순간 그 십자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야 할 일이 되고 맙니다. 자기가 버린 쓰레기는 자신이 치우면 되지만 그걸 엉뚱한 곳에다 버리면 다른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가련한 죄인들에게 ‘구원’이 다가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를 당신을 내어 바쳐 이루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올라갔고,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인 그 영광을 우리는 증거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방법을 강구합니다. 가능하면 십자가에 올라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다른 이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이들의 몫이 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 자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에, 그 몫은 낮은 이들의 몫으로 떠넘겨집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저마다 십자가의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머무르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 됩니다. 사랑이 필요한 일이고 그것이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만일 부모가 이를 소홀히 하고 다만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편한 것만을 추구하면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에 굶주린 아이가 되고 맙니다. 결국 부모의 십자가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셈입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미루어 두는 순간 그 십자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야 할 일이 되고 맙니다. 자기가 버린 쓰레기는 자신이 치우면 되지만 그걸 엉뚱한 곳에다 버리면 다른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가련한 죄인들에게 ‘구원’이 다가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를 당신을 내어 바쳐 이루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올라갔고,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인 그 영광을 우리는 증거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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