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바리사이의 초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난'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발에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뿌리는 것도 받아들이셨지요. 진정한 '가난'의 의미에 대해서 되새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구도를 현실적 잣대로 적용시켜서 부자들을 공격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게 됩니다.
제가 부유한 이들과도 또 가난한 자들과도 살아본 경험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모조리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역으로 ‘부유함’이 무조건 죄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부유함을 어떻게 모으고 있고, 그 가진 부유함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축복을 받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현세적인 축복에 대해서 거부하신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판잣집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면죄부를 받고 무조건 신앙인의 섬김이 되어야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도 자신의 선택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하며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 주어야 합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의 권익을 위해서 정의로이 맞서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측을 그 자체로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이나 사회 권익에서 소외된 이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피폐한 이들 모두를 가서 보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부자도 가난한 이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지요. 예수님은 의로운 이들이 아니라 죄많은 이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권리가 있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만난 분들은 부유한 가난뱅이들이 많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물질적으로 풍요로움 속에 살지만 영적으로 피폐한 이들이 많다는 말이지요.
제가 부유한 이들과도 또 가난한 자들과도 살아본 경험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모조리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역으로 ‘부유함’이 무조건 죄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부유함을 어떻게 모으고 있고, 그 가진 부유함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축복을 받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현세적인 축복에 대해서 거부하신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판잣집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면죄부를 받고 무조건 신앙인의 섬김이 되어야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도 자신의 선택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하며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 주어야 합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의 권익을 위해서 정의로이 맞서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측을 그 자체로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이나 사회 권익에서 소외된 이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피폐한 이들 모두를 가서 보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부자도 가난한 이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지요. 예수님은 의로운 이들이 아니라 죄많은 이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권리가 있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만난 분들은 부유한 가난뱅이들이 많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물질적으로 풍요로움 속에 살지만 영적으로 피폐한 이들이 많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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