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8)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무르는 그 순간에 우리는 주님을 도외시합니다.
먼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곁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고는 싶은데 누구를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시간, 노력, 재화 그 어떤 것이든 당신이 자의로 내어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선을 단순히 ‘돈을 건넴’이라고 생각해서 하기 싫어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욕심쟁이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줄 수 있는 것부터 내어주는 것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진 것 중에서 남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챙기고 생각하는 마음을 꾸준히 하다보면 그를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는 나의 필요보다 그의 필요를 먼저 살피게 되어 기꺼이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100원 한 푼도 아까워 벌벌 떨면서 어느 순간 돈을 많이 벌면 내어놓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순히 돈, 재화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노력 또한 내어줄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됩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돈으로 도와줘야 할 대상을 만나기가 더 힘이 든 실정입니다. 물건은 집에 남아돌고 넘쳐 흐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안에 내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나고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고, 우리의 노력을 쏟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음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 거룩한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 무엇을 할까요? 과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에 몰두하느라 바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 드리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왜냐면 주님을 사랑할 사람은 일찍부터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다른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여인의 찬양과 감사 예배를 지켜보는 이들은 이미 탐욕스럽고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를 걱정한 게 아니라 ‘나르드 향유’를 걱정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돈’이고 그 돈이 낭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지요. 자신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향유를 보고 기뻐한 게 아니라 아까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들 가운데에는 짜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예수님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사랑할 뿐입니다. 지금 ‘대세’인 가난한 이들을 부르짖어 주목받고자 하는 불쌍한 영혼들이지요. 교황님이 선출되고 난 후부터는 더욱 난리가 났습니다. 제 멋대로 교황님의 발언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면서 말마디 놀이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가난한 이는 나의 부모님의 모습으로, 나의 형제의 모습으로, 내 이웃의 모습으로, 내 직장동료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할 소중한 시간들이 존재합니다. 미사 안에서, 기도 안에서, 그 밖에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모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에 세속적인 사고에 빠져 예수님에게 주목하지 못하고 그분에게 부어지는 향수를 아까워하는 이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무르는 그 순간에 우리는 주님을 도외시합니다.
먼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곁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고는 싶은데 누구를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시간, 노력, 재화 그 어떤 것이든 당신이 자의로 내어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선을 단순히 ‘돈을 건넴’이라고 생각해서 하기 싫어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욕심쟁이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줄 수 있는 것부터 내어주는 것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진 것 중에서 남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챙기고 생각하는 마음을 꾸준히 하다보면 그를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는 나의 필요보다 그의 필요를 먼저 살피게 되어 기꺼이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100원 한 푼도 아까워 벌벌 떨면서 어느 순간 돈을 많이 벌면 내어놓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순히 돈, 재화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노력 또한 내어줄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됩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돈으로 도와줘야 할 대상을 만나기가 더 힘이 든 실정입니다. 물건은 집에 남아돌고 넘쳐 흐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안에 내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나고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고, 우리의 노력을 쏟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음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 거룩한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 무엇을 할까요? 과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에 몰두하느라 바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 드리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왜냐면 주님을 사랑할 사람은 일찍부터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다른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여인의 찬양과 감사 예배를 지켜보는 이들은 이미 탐욕스럽고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를 걱정한 게 아니라 ‘나르드 향유’를 걱정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돈’이고 그 돈이 낭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지요. 자신들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향유를 보고 기뻐한 게 아니라 아까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들 가운데에는 짜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예수님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사랑할 뿐입니다. 지금 ‘대세’인 가난한 이들을 부르짖어 주목받고자 하는 불쌍한 영혼들이지요. 교황님이 선출되고 난 후부터는 더욱 난리가 났습니다. 제 멋대로 교황님의 발언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면서 말마디 놀이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가난한 이는 나의 부모님의 모습으로, 나의 형제의 모습으로, 내 이웃의 모습으로, 내 직장동료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할 소중한 시간들이 존재합니다. 미사 안에서, 기도 안에서, 그 밖에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모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에 세속적인 사고에 빠져 예수님에게 주목하지 못하고 그분에게 부어지는 향수를 아까워하는 이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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